무일푼딴따라 (162.♡.119.154)
2024년 4월 2일 PM 08:44 · 수정됨(21:30)

“징병제는 황국신민의 영광”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청년들을 내몬 전 이화여전 교장 김활란(일본명 아마키 카츠란(天城 活蘭))은 1899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1907년 이화학당에 입학, 1918년에 졸업한 그는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22년부터 4년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과 보스턴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1931년 칼럼비아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그는 근우회와 YWCA 등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되는 1937년부터 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 조선부인연구회, 애국금채회 등에 참여 황민화운동과 내선일체운동 그리고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친일 행각으로는 1939년 6월 <동양지광>에 게재된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1941년 12월 임전보국단결전 부인대회 및 강연회에 연사로 나선 ‘여성의 무장’, 1942년 2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 등의 강연과 이화여전 교장으로 재직하던 1942년 12월 <신세대> 잡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써서 다시 한번 열렬한 친일성을 과시했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먼저 ‘반도여성 한 사람의 투사로서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영광’이라는 제목의 친일발언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 과거 조선의 부인운동은 어쨌든 화려한 시기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구호에 불과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일체의 대업 속에서 정말로 확고하게 현실성이 있는 부인운동이 전개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친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도 한번 들어보자.
“…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중략)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처럼 지덕체(?)를 고루 갖춘 김활란의 강연은 내선일체를 향해 그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잘 익은 지식은 강연장에서 거침이 없었고 서양문물까지 두루 겸비한 그의 행보는 각 나라를 누비고 다녔다.
“…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제군은 오늘 이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총후의 여성들은 제군들이 안심할 만큼 만사를 해낼 각오가 굳은 바이니, 바라건대 모쪼록 빛나는 전공을 세워 조선학도의 참다운 일면을 길이 청사에 빛내여라!〔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년 12월)〕
무수한 친일행각 불구, 이대에 버젓이 동상 서 있어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학교(이화여전)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며 감격하고 있는 것에서 보여지듯, 바로 무수한 친일행각을 일삼은 그가 유관순열사의 영혼이 살아 숨쉬는 이화여대에 버젓이 동상으로 서 있음은 탄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준 것은 그도 모자라 이화여대 측이 김활란상을 제정하면서 그 사유의 첫마디를 “한국 현대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김활란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하니 우리의 근현대사가 아찔할 따름이다.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이후의 행적들이다.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의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는가하면,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과 배화학원·국제대학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또한 정부 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6·25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를 거쳐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던 것이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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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주난민
24.04.02 · 172.♡.219.71
다크 모드에서 안보입니다 ㅠㅠ 친일행적 뿐만 아니라 4.19때 이대생들 시위참여도 막은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분이죠... -
Llorr
24.04.02 · 172.♡.233.30
김활란의 이름 ‘김’과 ‘란’을 따서 만든 교회가 금란교회고 그 교회 담임목사였던 사람이 이른바 반공 4인방 중 하나였던 김홍도죠. 개판인 곳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금란교회가 속한 감리교에서는 김활란을 대한민국 기독교에 좋은 일 많이 한 훌륭한 분이다 라고 가르칩니다. -
고고스트스테이션
24.04.02 · 172.♡.222.216
원조 국씨양이군요. - 2
2024년4월10일
24.04.02 · 172.♡.211.98
한동훈이
얼마나 역사지식이 부족하고
정무감각이 처참한 수준인지 보여줍니다
김활란을 물다니요 ㅋㅋㅋ -
찰찰스
24.04.02 · 172.♡.33.182
글씨가 안보여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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