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다모아보앙

Lv.1 다모아보앙 (165.♡.84.128)

2024년 5월 31일 AM 04:31 · 수정됨(10:24)

조회 2,210 공감 0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댓글 (8)

  • 뻘글젖문가

    뻘글젖문가 Lv.1

    24.05.31 · 211.♡.195.225

    오....반가운 시라 놀랐습니다.

    냉장고에 붙여놓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보는 시라서
    이제는 그냥 시를 외웁니다.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쓰여진지 오래된 시이지만
    현재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는
    정말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https://s3.damoang.net/data/editor/2405/comment_3542664161_cUnRthEa_8e6ad2d13a2bb3a8e866db927ac2be579ea20962.webp]
  • T

    TallFescue Lv.1

    24.05.31 · 174.♡.219.51

    비계따위에 화내고 음탕 대신에 분노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거죠
  • Silvercreek

    Silvercreek Lv.1

    24.05.31 · 223.♡.42.47

    대학 때 신동엽 시인과 함께 가장 좋아하던 시인입니다.
  • 날개달기

    날개달기 Lv.1

    24.05.31 · 121.♡.1.128

    시로 하루를 시작하네요. 사소한 것은 웃고 넘기며, 진실로 분노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 살살타

    살살타 Lv.1

    24.05.31 · 61.♡.92.124

    "분노할 줄 모르는 자는 조국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이다."
    이 비슷한 구절도 떠오릅니다.
  • L

    loveMom Lv.1

    24.05.31 · 211.♡.205.139

    언제 봐도 가슴 뜨겁게 만드는 시 {emo:damoang-emo-007.gif:50}
  • 불개미K Lv.1

    24.05.31 · 118.♡.12.7

    저도 정말 좋아하는 시입니다.
    윤가놈 대통령 되자마자 다시 찾아보고 읽은 기억이 나네요.
  • Hymn

    Hymn Lv.1

    24.05.31 · 218.♡.120.142

    오늘 아침 운동을 하며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 한편을 들었는데 이 시를 인용했습니다.
    다모앙에서 다시 전문을 만나다니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https://youtu.be/YJBkiRXy6qI?si=JmylJdb8UvvSdF0z&t=520
    공유가 적절할지는 모르나..약자의 보살핌과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일부 목사님입니다.
    논란이 생긴다면 삭제하겠습니다.
    부끄러움 느끼며 잘 살아보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말씀대로 벽에 대고 소리라도 쳐보며요.
    함께 잘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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