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59.♡.29.252)
2024년 6월 4일 AM 09:19 · 수정됨(15:49)
아래 리얼 발도술이라고 거합류 관련 이야기가 나와서 몇자 적어봅니다.
일본 고류 검술중에 거합(혹은 거합도)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일본 검술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술입니다.
단순히 발도 뿐만 아니라 납도와 반격기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급습에 대항 하여 기술을 펼칠수 있는 정신력을 키우는걸 통칭하죠.
단순히 서로 발도의 속도만으로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거리, 상대방의 발도의 자세, 그리고 자신의 기술의 능숙도와 그걸 적절한 타이밍에 구사할 담력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검술이 발달하게 된것도 후대에 점점 낭인이 늘어감에 따라서 기습으로 인한 공격이 많아지고 그 상황들이 대체적으로 앉거나 혹은 적을 등뒤에 두거나 상대가 이미 칼을 뽑고 선제 공격을 한 상황들이 많아지다보니 당시로서는 당연하게 익혀야 상황이었던 것이죠.
또한 그 시절 일본의 칼은 매우 약했기 때문에 ( 일본도는 사철 자체의 분순물도 높은편이었고 또한 제작과정에서 땔감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 ) 직접적으로 사람을 베어서 쓰러트리는것 보다는 작은 기술로 상대의 전투 능력을 상실 혹은 전투 불가 상태에 놓이게 하는게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검술은 동양 뿐 아니라 서양 고류 검술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오히려 수렴진화에 가깝게 비슷한 동작이 많죠.
( 서양의 검술관련은 ARMA나 서양검술영상을 보시면 이해가 될겁니다. )
초등학생이 서든잘하니까 스나 들면 내가 정말 총으로 다 잡을수 있다고 말하는것 같네요
현대 스포츠나 미디어의 칼싸움만이 '검술'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폐해인거 같아서 안타깝군요.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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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oonKnight
24.06.04 · 175.♡.3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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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나기
→ MoonKnight 작성자
24.06.04 · 59.♡.29.252
제 생각으로는 ..
우리나라의 경우에 기본적으로 단일 국가로서 왕권이 집중된 형태였고 이미 칼로서 암습하는경우에는 잡힐 위험성이 너무 컸죠. ( 도망치더라도 각 지방의 중앙군이 수배 )
일본의 경우 사실상 쇼군이 지배하는 막번 체제였지만 다이묘가 언제든지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에 참근교대 같은 제도가 있었던것이죠. 이러한 상황에 각 지방 다이묘들은 다른 다이묘의 영지에 대해서는 손을 쉽게 쓸수 없었기에 암살을 하더라도 도망쳐서 살 수 있었죠.
그러다보니 한국은 독살이나 활같은 조용한 암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단 활을 쓰는것 자체가 고급기술이고 .. 일본 활은 암살에는 적합하지 않기도했으니..
일본은 좀더 저렴한 (?) 칼잡이를 고용했다고 생각되네요. -
DDymaxion
24.06.04 · 221.♡.66.236
더 근본적으로는 다 아시다시피 중앙집권, 사병혁파, 문민통치가 제일 클텐데요.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이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
야야나기
→ Dymaxion 작성자
24.06.04 · 59.♡.29.252
명분과 인본은 의외로 큰 질서를 다지는대 큰 힘을 발휘했죠. - 별
별나라아톰
24.06.04 · 125.♡.232.103
무사를 바라보는 사회 시각과 문화의 차이가 한국과 일본은 많이 달랐습니다.일본의 사무라이(칼)는 사회 지배계급으로 근대화 직전까지 칼을 숭상하고 신성시하는 나라였기에 칼에 대한 다양한 문화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칼 실력이 뛰어나면 한 문파를 만들어 존경과 부를 쌓을수도 있었죠. 이렇게 만들어진 많은 검술의 유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곳도 많고, 오랜시간 다듬어지고 간결해진 검술이 진검뿐만 아니라 사슬,철퇴,근래에 들어 만들어진 총검술까지 전쟁에 사용되는 많은 무기종류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반면 우리나라는 무사계급에 대한 하대가 고려시대 이후부터 지속되어 무는 문에 비해 하대받아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게 전반적인 사회적 배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칼을 소지하고 지참하는걸 금지 시키는 조치도 있었습니다.무사의 대한 사회적 대우나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검술도장을 만들어 부와 명예를 창출할 수도 없는 사회였고,살아가기 위해 겨우 권력자의 식객 정도를 생각할수 있는게 일본과 한국의 현재 진검과 관련된 모습의 차이라고 생각 되는군요. 물론 우리나라에도 옛날 유명한 장군들이나 무사가 많았겠죠.그러나 일본이 보다 더 광범위하고 전반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자료에 보면 그 당시 일본의 진검을 수입한 물량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나라는 200년전 동네에서 1명 정도가 칼을 차고 다녔던 사회라면 일본은 100명이 칼을 차고 다녔다고 보면 됩니다 -
야야나기
→ 별나라아톰 작성자
24.06.04 · 59.♡.29.252
그건 좀 다르다고 봅니다.
'일본의 사무라이(칼)는 사회 지배계급으로 근대화 직전까지 칼을 숭상하고 신성시하는 나라였기에 칼에 대한 다양한 문화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부분은 일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和사상에서 본다면 좀 다릅니다.
계급의 고착 및 신분 심지어 태상의 이동조차 허용 하지 이 사상과 더불어서
12세기 겐페이 전쟁이후 막부의 시대가 태동하면서 '문'보다 '무'의 정권이 통치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이 권력의 유지를 통하기 위한 무력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지. '무' 그 자체의 숭상이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꾸준이 정권이 안정화 된 이후에는 무력에 대한 억제를 하기 위해서 막부가 힘썼던것을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고대의 일본 검술에는 (물론 그 당시 중세의 모든 무술이 그랬지만) 그 범위가 굉장히 넓었습니다.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것 뿐만 아니라 무기의 손질법, 수영, 칼 이외의 무기의 사용법, 땅을 파는법, 독을 제조하는법 등등
광범위하게 싸울수 있는 모든것을 합쳐 있다가 나중에 점점 냉병기로 인한 단일 전투에 동원 되거나 작은 국지전만이 생성되면서 다듬어( 사람을 빠르게 살상하는법) 지기 시작한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모두 무가에 대한 하대가 있었고 그 뒤로 반란이 있었고 성공 했지만
외세의 침입과 문화의 전파로서 다시금 무력이 아닌 문화로서의 통치 기반을 자리잡았던 우리나라와
외세의 침입없이 꾸준히 국지전이 존재 했던 일본의 환경적인 차이가 컷던것 뿐입니다.
그리고 크게 잘못알고 계신것이 일본이라도 검술실력이 무조건 좋다고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갈수 있던것은 아닙니다.
가장 극명하게 볼 수 있던것이 전란의 승자중 하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지 못한것으로도 잘 알수 있죠.
검술 실력만으로 올라갔다면 카와카미 겐사이 같은 사람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맞겠죠.
그리고 일본의 무기가 우수 해서도 있을수 있겠지만 일본의 진검 수입물량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사대부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전란 이후에 한국에 일본도라는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일본도의 수집이나 감상이 사대부의 취미로 자리 잡았던것도 그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군사 교리로는 양반은 활을 이용한 정신 수련과 무력의 증진을 꾀하였지 칼을 이용한 근접전을 행하는것은 권장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은 200년전 동네에 한두명 명 사수가 있었다면 조선에서는 동네에 100명정도 명사수가 있었던 셈이죠. - 별
별나라아톰
→ 야나기
24.06.04 · 113.♡.78.117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말씀 중 일본 사무라이 계층이 검술의 실력에 따라 권력의 상층부까지 올라간다는 의견은 제시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현 시대 일본에 다양한 검술이 계승 발전되어 온 데 국한 해 일본의 경우 검술이 뛰어날 경우 검술도장(북진일도류,,무슨 무슨 류 등으로) 을 만들어 제자들을 양성하고 그 유파의 수장으로 대우 받을 수 있는 부분을 말씀드린 것 입니다. -
야야나기
→ 별나라아톰 작성자
24.06.04 · 59.♡.29.252
지금 말씀하신 댓글에 '검술도장(북진일도류,,무슨 무슨 류 등으로) 을 만들어 제자들을 양성하고 그 유파의 수장으로 대우' 라는 부분이 권력의 상층부라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는 이야기 입니다.
일단 일반인이 자신이 검술을 배우는 유파를 이어 나가서 검술도장을 열기 위해서는 면허개전을 받아야하는데
면허 개전 자체가 일반인에게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검술도장의 문하생 = 수강료 이기때문에 쉽게 면허개전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이 면허 발급이후에 사건 사고를 친다면
해당 검술 유파에도 책임이 있을수 있기때문에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검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발급을 섯불리 해주지 않죠.
특히 면허 개전의 경우 해당 유파의 비기를 전승하였다는 증거도 되기때문에 다른 유파로 검술이 유출이 되는것을 방지 하는 목적도 있어서 발급이 어려웠습니다.
만일 신분이 확실한 경우에는 발급이 매우 쉽고 광고도 되기때문에... 검술 면허 개전도 빈인빅 부익부 현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이 검술도 장을 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단 면허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사무라이가 되어야 하는데.
사무라이가 되기위해서는 사무라이가 아닌 이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이시가루에서 올라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올라온 사무라이가 자신만의 검술 도장을 아무렇게나 열수도 없습니다
보통 어느정도 마을에는 검술도장이 있고 만일 검술도장을 열려고 하더라도 쉽게 다이묘에게 도장을 함부로 열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무라이가 된다는것은 최소한 중인이상의 신분으로 에도 시대 이후에는 관직에 오른것이고 그에 따른 권력을 밟아갈수도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내용만 본다면 검술을 배워 사무라이가 된다는 것은 검술로만으로 관직을 하사받고 올라갈수 있다는것과 같은 말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
이유는 우리나라는 기습을 주로 활로 하였고 칼은 전투를 시작 할때 이미 빼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기 때문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