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묵은 1916년 8월 13일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938년 박정희가 졸업한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6월부터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다. 1940년 8월 일본군에 자원하여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훈련을 받던 중 1940년 11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가 주최한 지원병좌담회에 참석했고,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일기’를 기고했다. 그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이후 신상묵은 헌병 오장(하사급)을 거쳐 1944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헌병 군조(중사급)에 이르렀다. 창씨개명 이름은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다.
해방이 되자 처벌은커녕 신상묵은 되레 출세길을 내달렸다. 신상묵은 1946년 7월 경찰에 입문했고, 9월 전라남도 진도경찰서장을 시작으로 1950년 5월 전라남도 경찰학교 교장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 월배지구 경찰전투대 사령관을 맡았고, 1950년 총경으로 승진해 경상북도 영일경찰서장, 9월 경상북도 보안과장을 지냈다. 1951년 7월 경무관으로 승진한 신상묵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1952년 10월 서남지구 치안국 전방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4월 전라북도 경찰국장(전북 경찰청장 격), 1953년 12월에는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등 요직을 거치다 1959년 4월 경찰에서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전라북도 산업국장으로 일했고, 후에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의 고문으로 있었다.
신상묵은 친일, 고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이와 관련해 재판을 받거나 진술을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전혀 다른 일로 재판정에 올랐다. 1960년 초, 지리산에 무분별한 벌목과 벌목허가가 남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리산은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었다. 1964년 11월 박정희는 불법 벌목자들을 처벌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이에 경남과 남원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서남흥업 주요 인사 14명이 구속됐다. 이 중에 신상묵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이후 신상묵은 헌병 오장(하사급)을 거쳐 1944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헌병 군조(중사급)에 이르렀다. 창씨개명 이름은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다.
해방이 되자 처벌은커녕 신상묵은 되레 출세길을 내달렸다. 신상묵은 1946년 7월 경찰에 입문했고, 9월 전라남도 진도경찰서장을 시작으로 1950년 5월 전라남도 경찰학교 교장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 월배지구 경찰전투대 사령관을 맡았고, 1950년 총경으로 승진해 경상북도 영일경찰서장, 9월 경상북도 보안과장을 지냈다. 1951년 7월 경무관으로 승진한 신상묵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1952년 10월 서남지구 치안국 전방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4월 전라북도 경찰국장(전북 경찰청장 격), 1953년 12월에는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등 요직을 거치다 1959년 4월 경찰에서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전라북도 산업국장으로 일했고, 후에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의 고문으로 있었다.
신상묵은 친일, 고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이와 관련해 재판을 받거나 진술을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전혀 다른 일로 재판정에 올랐다. 1960년 초, 지리산에 무분별한 벌목과 벌목허가가 남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리산은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었다. 1964년 11월 박정희는 불법 벌목자들을 처벌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이에 경남과 남원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서남흥업 주요 인사 14명이 구속됐다. 이 중에 신상묵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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