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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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잘 다니던 막내동생이 서른 나이에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고 했다. 여자는 반드시 ‘시집’을 가야 하는 줄 알던 어머니가 안절부절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막내는 제 인생에서 단 한번도 제 고집으로 뭔가를 하겠다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가 이때만은 뜻이 확고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어머니를 달래고 막내의 선택을 응원했다. 결혼만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라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막내는 어머니가 40줄에 낳은 늦둥이로 나와 8살이나 나이차가 났다. 순서로는 중간인 나와 그정도였으니 내 손위의 언니 오빠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막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 나는 이미 집을 떠나있어 그 아이와는 휴가 때나 만나는 처지였다. 그 지역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다닌 바로 위 언니와 가장 오래 함께 있었으나 넷째마저 결혼해 집을 떠나면서 막내는 이미 상노인이 된 부모 곁에 외톨이로 혼자 남겨졌다.
내 기준으로, 막내의 인생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미대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실로 어이없는 실수로 미대를 가지 못했다. 나같으면 재수를 해서라도 뻗대어 다시 미대를 갔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모와 살아서인지 양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아이는 뭐든 쉽게 포기하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했다. ‘여자 직업’으로 좋다며 부모가 권해서 그 지역 대학 유아보육과에 들어갔으나, 결국 그쪽으로 진출하지 못했고(혹은 안했고) 이후 다시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고향에서 취업한 후에도 세상 물정 어두운 노친네들이 이것저것 좋다며 시키는 걸 다했다. 가령 컴퓨터 무슨 자격증, 회계 무슨 자격증...이런 걸 하라는 대로 해서 꼬박꼬박 자격증을 땄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어리숙하기만 했고, 그 나이 되도록 연애다운 연애도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시 가족 중에는 오랜 원불교 신자인 어머니 외에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혼자서 성당을 나가더니 수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규정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성당 신부님이 특별 추천서를 써주셔서 막내는 무난히 수도원에 입문했다. 광주의 수도원에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는 행복해보였다.
몇 년간의 예비수녀 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공식적인 서원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원장 수녀께서 허리가 아프다는 막내를 서울 병원으로 보냈다. 수녀 활동을 하려면 무엇보다 몸이 건강해야 하니 서원 전에 치료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진료 결과가 충격이었다. 척추에 종양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진행되었으나 신경을 다칠 위험 때문에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진 못했다. 종양으로 인한 척추측만증 진행을 막기 위해 척추를 보강재로 보강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했다. 허리를 구부리지 않는 입식 생활, 무리한 신체활동 금지, 주기적인 검진으로 병변 체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수도원에서 막내가 수녀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서원 후에는 신체적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수도원에서 책임을 지지만, 서원 전에 이런 사안이 발생하면, 서원 자체가 불가해지는 것이었다.
몇 년간의 수련 과정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나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다.
그 후로 막내는 수녀도, 직장 생활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근 30년간 아픈 몸으로 살았다. 종양이 계속 자라나 척추를 압박하므로 그때마다 재수술을 거듭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와 허리가 아픈 막내가 단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다른 형제들은 제 살기가 바빠 가끔씩 내려가 얼굴 디밀고 안부나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막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내게는 너무 참혹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막내의 ‘하느님’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저 아이의 인생은 대체 무엇이었느냐고. 모든 사람의 삶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저 아이의 삶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냐고. 신의 뜻은 무엇이었느냐고.
나는 간절히 그 답을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했다.
뼈를 누르는 종양의 힘이 세서 척추를 보호하는 보강재가 계속 터져나갔다. 그때마다 재수술을 했지만, 보강재는 오래 버티지를 못했다. 2010년 주치의는 극단적 처방을 했다.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절대 안정을 명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장기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학병원에 장기입원이 안되어 요양병원과 대학병원을 번갈아 오가야 했고 병원을 옮길 때도 몸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앰블란스로 이동해야 했다. 그 사이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어 집 부근 요양시설에 모시고, 막내가 퇴원할 때까지만 계시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먼 길 떠날 때까지도 막내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와 헤아려보니 그 세월이 무려 8년이었다.
서울에서 병원 생활을 하니 고향에 있을 때보다는 더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다. 자주 보니 더욱 불가사의했다. 그렇게 누워서도 막내의 얼굴은 늘 평화로웠다. 웃을 일이 뭐 있을까 싶은데 웃기도 자주 웃었다. 수도원에서 배운 종이접기로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만들어 병실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했다.
그 사이 암이 발견되었다. 빠르게 전이되었다. 막내는 많이 아팠다.
병원에서는 마침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서도 막내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내가 가면 웃었다. 생각해보니, 병원 생활 중에 막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막내는 두렵지 않았을까? 하느님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초여름의 어느날 막내는 세상을 떠났다. 더 놀라운 것은 막내의 임종을 마치고 나서였다. 막내가 일찍 시신기증 서약서를 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종하자마자 대학병원측에서 그녀의 주검을 거두어갔다. 그녀는 정말 아무 것도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몇 달 후, 오빠가 전화했다. 병원에서 유골을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다고. 우리는 뒤늦게 우리만의 의례로 막내를 보내기로 했다. 형제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김해 부근 선산의 납골당에서 먼저 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함 옆에 막내를 봉안했다. 막내 덕분에 그녀가 빠진 4남매가 실로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바닷가에서 하루밤을 보내면서 긴 방파제 위로 떠오르는 일출의 햇빛을 보았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하루였다.
우리 막내. 수녀는 못되었지만, 나는 그녀가 떠나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강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 삶이 무슨 의미냐고 타자가 물을 때 그 삶 자체가 의미가 되기 위해서 기도했을 거라는 것을. 하느님의 존재가, 기도하면 복을 주는 그런 ‘거래’의 대상이 아니며, ‘목사’나 ‘수녀’를 통해야 건너갈 수 있는 국경이 아니라는 것을. 신앙은 타자를 증오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수단이며 타자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신앙이란 그런 거라는 것을.
가진 것이 없어 죽고 난 후의 몸까지도 다른 이들을 위해 쓰이기를 바랬던 현주 펠리치타.
하느님을 팔아 자기를 앞세우는 독사의 무리들이 거리를 횡행할 때, 문득 너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신앙이란 무엇인가.
너의 인생을 ‘불행’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래서 너의 ‘하느님’을 원망하고 원망했던 언니가 너의 죽음으로부터 이태가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잠긴 목을 풀며 애도의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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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악님의 댓글
바림님의 댓글
저 역시도 생각이 깊어지네요
finalsky님의 댓글
언제쯤 저도 왜 사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일리악님의 댓글
가로도사님의 댓글
말씀처럼 종교는 아무런 목적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도 천주교 신자지만 동생분이 예수고 하느님일 거라 확신합니다.
llaaff님의 댓글
XㅡCaliver님의 댓글
인생에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에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깨달음을 주는 글이었네요.
어떤 방식으로 든 결론을 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의미를 주는 글이었네요.
바세린님의 댓글
하늘아이님의 댓글
사실 종교가 그런 것인데, 자신의 복을 찾고자 종교를 찾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신을 믿는 것은 그냥 그대로 믿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지, 자신이 원하는 길에 신이 계시지 않다고 징징대면 안되죠.
그래도 아무쪼록 고인의 마지막 길에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이 두 손 들고 반기시길 기도해 봅니다 ㅠㅠ
텔리앙님의 댓글
현주 펠리치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곳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씩씩한초록님의 댓글
남은 가족분들의 마음에도 평화, 평화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WinterIsComing님의 댓글
eraser님의 댓글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고인의 명복과 영혼의 평안을 빕니다.
달려라하니님의 댓글
글을 정말 잘쓰시네요
눈시울이 붉어지고 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라봅니다
humanitas님의 댓글
도시의남자님의 댓글
본문의 이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된장찌개님의 댓글
날돈님의 댓글
amafo24님의 댓글
참다운 신앙에 대하여 다시 생각합니다.
대끼리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