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이 정조대왕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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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왕' 호칭이 붙은 왕이 몇 명 있습니다. 세종대왕, 정조대왕이 대표적이죠. 조선 전기에는 세종, 조선 후기에는 정조가 대표적인 왕이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세종대왕의 업적은 분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글 창제' 하나만 놓고 봐도 조선왕조의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는 편이거든요. 부정부패도 많았고 시대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백성들만 힘들게 하다 식민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하나를 건졌으니까요.
그런데 정조대왕 하면 딱히 떠오르는 업적이 없습니다. 수원 화성 만든 것이야 그냥 신도시 하나 건설한 것이니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없죠. 당시 정권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을 억제하기 위해 채제공, 정약용 등 남인을 중용한 것도 특이할만 하지만 대세(노론 주도 정권)에는 지장 없었고, 정조 사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정약용 등이 크게 핍박을 받았죠.
규장각을 통해 각종 서책을 편찬하는 등 문화사업을 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민중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는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왜 정조를 정조대왕이라고 했으냐 하면, 그건 바로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리면서 국가 자체를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 열성을 다한 점이라고 하겠네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것을 천천히 읽다 보면 그야말로 정조라는 인물이 얼마나 일을 많이 했고 백성들 민원 해결에 노력했는지 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신하가 어떤 말을 하면 임금이 의례적으로 한두 마디 하는 것이 보통인데, 정조 임금은 주절주절 쏟아내고 이런 것도 알아봐라 저런 것도 해봐라 미친듯이 명령합니다. 그리고 기억력이 남달라서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도 나중에 떠올리며, 어떤 신하 보고 '네 조부가 선대왕 시절에 이런 일을 했는데 손자가 되어서 같은 일을 맡았네, 우연이지만 신기하구나. 너를 특진시키마. 조부의 은덕으로 알거라!' 이럴 정도였죠.
그리고 지금 의전비서관, 연설비서관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임금의 이름으로 내리는 글은 대부분 신하들이 짓습니다. 홍문관, 예문관 이런 곳에 있던 신하들이 글을 짓고 그걸 임금의 이름으로 내려보내는 것이죠. 근데 정조는 상당수 글을 직접 짓습니다. 원래 세자(세손) 시절부터 자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그것이 '규장각 일성록'으로 굳어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3대 국정 기록물이 되어 구한말까지 이어집니다.
학식에도 자신이 넘쳐서 신하들과 유교(성리학) 내용으로 말싸움을 해도 밟아버릴 정도였기에 나중에 되면 스스로 규장각 신하들을 가르칩니다. 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 '초계문신제도'입니다. 문신(=문과 과거시험 급제 출신) 가운데 직접 발탁한 인원을 규장각에서 재교육하는 것인데 그걸 정조가 직접 주관했죠.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고등고시 합격자의 스승이 되어 직접 지도하는 것과 비슷하죠.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로 호불호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 정치를 잘 했습니다. 영조가 어렸을 때 궐을 밖 민간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백성의 삶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죠. 그런데 정조는 그런 영조를 저리가라 할 정도 백성들의 민원을 잘 챙겼습니다. 수시로 한양 길거리에서 민원을 받았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할 때마다 길에서 격쟁이라는 형식으로 민원을 받아 처리했죠.
조선왕조 330여 개 행정구역에서 수없이 올라오는 각종 문서를 직접 처리하고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하면서 지방관들이 잘 통치하고 있나 세밀하게 챙겼음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삶이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한 시절이었습니다. 관리가 백성을 수탈하거나 해서 민란 같은 것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죠.
청나라에서 강희제, 옹정제가 격무에 시달리며 일한 것으로 유명하다면 조선왕조에서는 단연 정조가 있었다고 해야할까요.
하여간,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신하들과 항상 토론하고 논의하고 지시하고 채근하고 살아서 그랬는지 비교적 젋은 나이인 47세에 갑자기 사망합니다. 10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조선시대 역사가 꽤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만.
이처럼 정조가 남긴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라는 인상이 워낙 강해서인지 정조 이후 왕(순조, 익종, 고종)들은 모두 정조 임금처럼 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정조께서 이러한 말을 하셨다' 하면서 지시를 했을 정도였죠. 그래서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정종대왕'이었죠. 정종이라는 묘호가 정조가 된 것은 대한제국 출범 이후인 1899년이거든요.
제목은 농담글처럼 적었는데 본문이 꽤 진지하고 길었네요. ㅎㅎ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Feye님의 댓글의 댓글
조는 창건한 사람한테 붙입니다. 태조가 그거죠. 세조? 단종 죽이고 지가 해처먹은지라 당연히 "당시" 평가로 조 안달아주면 꽤나 비방당했을 겁니다. 그러니 아들 예종이 조 붙인 겁니다. 안그러면 자기 사촌 죽인 죄과 끝까지 따라붙을테니까. (그리고 "세"자는 정복군주한테 주는 건데, 세조가 정복한 건 자기 조카죠. 호칭 인플레인 이유 하나 더 입니다.) 그 이후 조 붙인 거 보면 가관입니다. 런조와 런도못한 조는 어떻습니까? 광해군과 효종이 본인 정통성 만드느라 조 붙여줬지요. 영종과 정종 (...여기서 공정왕의 안습함이 드러납니다.), 순종은 나중에 고x이 띄워준답시고 조로 바꾼 케이스고요.
간단히, 조선의 "조"는 태조 빼고 다 아부로 인한 묘호 인플레로 보시면 됩니다. 명나라도 태조하고 성조(이사람도 태종이었다가 후대에 아부 좀 먹은 케이스입니다) 빼고 다 종이지요. 세조와 선조는 최대한 양보해서 정치적 상황상 뭐 그럴 수도 있다 치는데 인조가 1등급 받았다고 정말로 생각하십니까? 허리만 유연하고 하체단련 안해서 런도 제대로 못 뛴 왕이?
세이투미님의 댓글의 댓글
두번의 호란에도 나라를 잃지 않은 왕 이라는 평가였죠
지금의 평가로 당시의 시대를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박정희 죽었을때, 그 시대는 어떤 묘호를 붙였을 것 같습니까 ?
Feye님의 댓글의 댓글
박정희 뒈졌을 때 그 시대의 평가는 여대생 따먹다 부하에게 총맞고 뒈진 놈입니다. 제가 그 시대 인물이라 잘 알죠.
세이투미님의 댓글의 댓글
요즘 MZ 세대들이, 님의 세대를
고도성장기에 편안하게 꿀 빤 세대라고 욕하는 것 만큼 말입니다
무지개발자님의 댓글의 댓글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인조에게 조가 붙은 것은 호란을 겪은 때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반정으로 집권해서 새로 왕실 정통성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선조의 후손 가운데 광해군이 아니라 광해군의 동생 중 하나인 원종의 아들로 새로운 왕실 계통을 수립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열조'로 정했는데 곧 '인조'로 수정합니다. 시호도 그렇지만 묘호도 어느 정도 인플레가 있었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참, 고종이 황제에 오른 후에 원래 황제가 되면 위 선대를 추존하는 예법에 따라 점차적으로 장조(사도세자), 정조(정종), 문조(익종) 등이 조로 개칭되죠.
아사님의 댓글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메카니컬데미지님의 댓글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myrandy님의 댓글
소현세자도 그렇고, 효종도 그렇고...
RanomA님의 댓글의 댓글
moomin8님의 댓글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정조 시대 당시 나라가 발전했느냐 하는 부분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백성을 위해 정치하고 국가의 내실을 잘 다지며 부정부패를 최소화하려 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두루미235님의 댓글
울라리숑숑님의 댓글
지지브러더스님의 댓글
똘똘이푸님의 댓글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똘똘이푸님의 댓글의 댓글
사막여우님의 댓글
위대한 임금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하죠.
정조는 영조와 건륭제라는 훌룡한 롤모델이
가까이에 있어서
그 어깨위에서 출발한 셈이었죠.
정조가 즉위한 1776년은
청나라가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고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던
세계사적 변화의 시기였죠.
유교적 이상군주에 어울리는 모범을 보인 군주였죠.
아쉽게도...
세이투미님의 댓글
1등급은 -조, 2등급은 -종, 3등급은 -군 이구요
세종도 당시의 평가로는 1등급을 받은 임금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