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의 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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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거나 화려하거나 모두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무엇이 세련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다. ‘세련’에도 재정의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이제 세련됐다 하는 칭호는 이제 겉을 치장하는 것만으로 얻기 힘들어졌다.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신발을 신는다고, 좋은 회사에 다니고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세련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더는 말이다.
한때는 제법 좋은 시절이 있었다. 돈을 벌고 남들이 인정하는 좋은 옷과 차, 액세서리를 두르면 세련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물론 오래가진 못했다. 원래 세련된 것, 힙한 것, 멋진 것들은 누군가 따라올 때 (특히 꼰대, 벼락부자들 그리고 아재들) 그 종적을 감추니까. 로고를 숨기고 백화점이 아닌 로드숍, 편집매장으로 숨어든 ‘무심한 듯 시크한’ 브랜드들은 제법 세련된 사람과 세련된 척하는 사람들을 분간할 수 있게 했다. 제법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세련된 사람이 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완전히 바뀌었다. 몇 선택받은 주류 브랜드가 로고를 숨기고 세련됨을 유지하든, 로고를 앞세워 권위를 과시하든 이젠 더는 패션 그 자체가 세련됨을 나타낼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이미 컬렉션 쇼 장에서 여러 번 드러났고, 브랜드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으니까.
런웨이 옷은 이제 더 프런트로의 앉은 셀럽의 태도보다 많이 주목받지 못한다. 사실 셀럽 또한 패션쇼장을 찾은 블로거, 유튜버보다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쇼장 안을 찍은 카메라보다 밖을 찍는 카메라가, 쇼보다 쇼장을 찾는 어린 블로거가 더욱더 화려하게 대중을 리드하고 있으니까. 이게 다 SNS 덕이다. 여기서 ‘덕이다’를 ‘때문이다’로 오인하면 촌스러운 삶이다. 세상은 이미 이렇게 됐으니. SNS를 통해 누구나 급격하게 대중 앞에 설 수 있게 됐고 또한 매우 대중적인 것까지 개인화됐다. 이제 삶은 TV나 브랜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기존의 권위가 무너지고 대중이 권력이 되는 사회다. 더는 한 장의 이미지, 한 신의 느낌만으로 우위에 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련된 삶을 더 이상 미디어나 브랜드, 주류라 여겨진 사회의 규범에서 찾지 않는다. 어디 감히 패션쇼장에, 명품 브랜드 행사에 블로거가 들어오냐고 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SPA를 통해 모두 최신 트렌드의 옷을, 명품 디자이너의 테일링을 걸칠 수 있게 된 이상 잰 척하는 브랜드는 세련되거나 멋져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스트리트 패션이 더욱 멋지다. 슈프림, 반스 등과 콜라보 하지 못해 안달이 난 브랜드들만 봐도 그렇다. 세련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결정된다. CF를 통해 비치는 15초가 아니라 SNS를 통해 드러나는 매 순간순간이 모두 그렇다.
세렴 됨은 한 장 ‘느낌적인 느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리수를 이딸라 컵에 마시는지 탄산수를 이케아 컵에 마시는지. 보수지를 아이패드로 읽는지 종이 잡지로 구독하는지를 봐야 한다. 주말에 스톤아일랜드 옷을 입고 백화점에 가는지, 카라반을 끌고 카야킹을 즐기며 파타고니아 레트로 X 오리지널을 걸치는지 하는 것이 세련됨을 가른다. 옷을 잘 입든 아니든 상관없다.패션마저도 더는 옷에 국한되지 않는걸….
세련됨은 라이프 스타일 전체로 평가된다.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갤러리를 찾는지, 맨투맨은 어느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애플인지 샤오미인지, 어떤 채널의 뉴스를 어떤 방식으로 청취하는지 등…
자신 있게 심벌만 보고 벤츠를 샀다고 말하는 것은 더는 시크하지 않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는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세련된 삶은 더 이상 브랜드나 취향 정도로 얻을 수 없다. 척도는 관점이다. 스스로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 그 과정이 세련됨을 나누는 척도다. 독특하면서도 확고한 관점이 세련인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