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셰도우 (180.♡.185.178)
2025년 5월 7일 AM 09:56

철학박사 윤은주 박사님이 지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가이드북 겸 해설서입니다.
한나 아렌트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시리즈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읽어보기에 좋은 책입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나 아렌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던 라헬 파른하겐(Rahel Varhagen)이라는, 아렌트보다 한 세기 전인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독일에서 살았던 유대인 여성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아렌트가 독일에서 살던 1930년경부터 이 여성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해서 미국으로 망명하고 난 뒤인 1957년, 그러니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간하기 7년 전에 라헬 파른하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할 정도로 한나 아렌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라헬 파른하겐이라는 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8세기 말에 독일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 여성 라헬 파른하겐은 1793년 베를린의 소박한 다락방에서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들의 사교모임을 주도하기 위해서 살롱을 열었습니다. 살롱은 대화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서, 여기에는 훔볼트 형제, 괴테, 하이네, 헤겔 등의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 주류가 되는 파브뉴(parvenu, 책 라헬 파른하겐에서는 벼락 출세자로 번역)로서의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은 수많은 거짓말과 속임수, 권모술수를 통해 남을 누르고 올라서서 결국에는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 나를 잃어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라헬은 부유한 유대인과의 결혼을 통해 이런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리고 라헬다운 모습도 잃어버린 채 다양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게 되는 그런 삶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라헬다운 삶이란 서로 다른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서로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삶으로서, 그것이야말로 라헬이 선택한 의식 있는 패리아(the self-conscious pariah)로서의 삶입니다.
이런 라헬의 삶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18세기를 살았던 라헬의 삶과 20세기 유대인 여성으로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꺠닫고서는, 유대인으로서 주류가 되어서 현실에 대해서 조건없이 순응하는 파브뉴로서의 삶을 살기보다 자신만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패리아로서의 삶을 살기로 합니다. 그 용기의 대가로서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 친구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하더라도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당시 주류 유대인들이 가졌던 관념과는 다르게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며 아이히만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라헬 파른하겐의 이야기가 한나 아렌트에게 녹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책 라헬 파른하겐을 읽으면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절판된 데다가 중고로 구하기도 힘든 터라, 이 책에서 말하는 라헬 파른하겐에 대해서 알고 한나 아렌트의 책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들어가면 보다 이해하기에 수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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