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나의 80년대 (3)
페이지 정보
본문
길게 글 쓰면 될 일이지, 왜 짧게 여러 도막으로 쓰는고 묻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바쁘기도 하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해서… ㅎㅎㅎ
***
7~80년대를 살았던 세대는 아마도 "물자 절약" 이라는 것을 참 여러 모습으로 강제 당하고 살았다. 요즘은 환경보호 차원에서 물자를 아껴 쓰자는 쪽이었겠는데, 그 당시는 '경제가 어렵다' 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오일쇼크라는 미증유의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한 선진국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몰려오던 때였으니, 이해를 해 줄만도 할 것 같긴 한데, 이상한 부분으로 절약을 강조하다보니, 우스운 일들도 많이 있었다. 몽당연필을 심지 끝까지 써야 한다고 하면서, 짧아진 연필을 모나미 153 볼펜 껍데기에 끼워서 쓰는 방법을 제시했다. 생각은 좋았겠지만, 모나미 153 볼펜 다 쓴 것을 국민학생이 갖고 있을 리 만무하며, 혹여나 언니 오빠가 쓰던 모나미 볼펜이 있다 한들, 그 당시는 볼펜 심지만 팔기도 할 만큼 열심히들 아끼던 시절이다. 아무튼, 다 쓴 볼펜으로 연필 깍지를 만들어서 몽당연필을 쓴다는 것은, 취지는 동의하나, 실행은 쉽지 않았다. 문제는 선생님들이 그걸 지적하고 다닌다는 것이겠지.
우리 선배 세대들은 혼식 장려의 일환으로, 보리나 콩 등 잡곡이 섞인 밥을 도시락으로 싸 왔는지를 검사하던 적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혼/분식은 언제나 권장했고, 가끔 드문드문 도시락 검사를 들어오는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 당시 유행어는 "불경기" 였다. 하지만, 아직도 잘 이해는 안 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80년대는 그 유명한 '3저 호황'의 시기였다 하는데, 도대체 누구 경기가 불경기였을까?
학교에서 성금도 참 뻔질나게 걷었다. 불우이웃 돕기 성금, 폐휴지 걷기, 크리스마스 씰... 이런저런 성금의 정점이었던 "평화의 댐" 성금. 테레비에서는 63빌딩이 찰랑찰랑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면서 위기의식과 경각심을 부추겼고, 북한의 금강산 댐 수공에 맞서는 대응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80년대 중반 학생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웠던 금액 일천 원을 요구했다. 그 돈은 다 어디 갔을까?
부동산도 들썩였다. 반 친구들 중 이사를 일 년에 한 번씩 다니는 집도 심심치 않을 지경으로 부동산 급등이 심각했다. 그것을 소재로 한 테레비 드라마도 종종 보였다. 그러면서 이 꼬마에게도 들렸던 소위 "이철희 장영자 사건", 어린 귀에도 똑똑하게 박히는 이채로운 별명 "빨간바지" 장영자. 누구는 빨간바지가 이순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그 빨간바지는 부동산 급등의 아이콘이었다.
격동의 시기였고, 시계 제로의 다이나믹 코리아였다.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동짓달님의 댓글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왜 나쁜 놈이 천수를 누리다가 가게 하시나요?"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loveMom님의 댓글의 댓글
솔직히 말해봐여~
학창시절 전설로 듣던 사전 통채로 외운다는 그분이져???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junja91님의 댓글
loveMom님의 댓글의 댓글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loveMom님의 댓글의 댓글
소금쥬스님의 댓글
500원식 강제로 걷었다는건 기억나네요..
79년 국민학교 6학년이었는데
수학여행도 못가고 졸업 앨범도 없었습니다...
Java님의 댓글
저희는 졸업 앨범을 만들지 않았네요.
딱히 이유를 말한 것 같지 않은데요(제가 기억 못하는 것일수도)
단체 사진 한장 찍고 말았다는.
그게 절약 강조 때문인 것 같네요
도미에님의 댓글
주2회 정기구독 갑시다~~
주2회 연재 읽는 재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짓달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