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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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가 보셨을 만한 여행지 경주, 그런데 지금 와서 뭐 기억나는 거 있냐 하면 또 딱히 뭐라고 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는 곳이 또한 경주 되겠습니다.
저는 경주 두 번 가 봤습니다. 두 번 다 수학여행 입니다.
지난 글들에서 밝힌 것 같이, 나름 관내에서 괜찮은 사립 국민학교를 다닌 덕에, 국민학교 시절에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6학년 전체가 고속버스를 대절해서 경주까지 가는 길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국민학생이라고 두 좌석에 세 명씩을 앉혔는데, 일찌감치 성인 좌석 하나를 차지해야 할 만큼 덩치가 있었던 저에게는 여간 불편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인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기차 여행이었습니다. 세상 느린 기차 "비둘기호" 에 몸을 싣고 달려가는 길은 지루함 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비둘기호는, 그 당시 기차 등급 (새마을, 무궁화, 통일, 비둘기) 중 최하위 등급으로서, 기차역 모두 멈추는 완행 열차입니다. 낡은 객차에 꾸역꾸역 실려 달려가는 기차는, 대략 두 시간쯤 지나면 왜 그리 머리가 아팠는지, 지금도 기차 여행을 꺼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간다 하면, 그곳에서 보게 될 유적지에 대해서 미리 공부하고, 우리가 보게 될 것들을 미리 살펴보고 했었다면 좋았겠지만, 국민학교 때에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고등학교 때에는 공부에 바빠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몸만 실려 갔다올 뿐인 것이, 비참한 우리 수학여행의 현실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억력은 나름 좋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도통 경주에서 뭘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불국사, 천마총, 석굴암… 요렇게 세 군데는 좀 기억이 있지만, 나머지는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지 하면서 줄줄이 걸어 들어갔다 나오는 코스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고, 조금만 신경 썼어도 훨씬 더 알차고 풍성한 시간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토함산 일출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들을 많이 들었지만, 토함산 올라가는 코스는 언제나 일찌감치 해 뜨고 나서 아침에 버스에 실려 올라가는 것이었죠. 고등학교 때에는 버스에 같이 탑승한 안내원 누님이 뭐라고 뭐라고 설명을 해 줬는데, 이 냄새나는 남고 놈들은 누나가 뭐라고 하는 소리는 들을 생각이 없었지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국민학교 수학여행 때 숙소는 호텔이라는 이름의 장급 여관 같은 곳이었는데, 온돌방 하나에 30명씩 밀어넣고 잤습니다. 화장실은 금세 지린내가 진동했죠. 머리 좀 일찍 큰 놈들은 여자애들 묵고 있는 2층에 간다고 몰려가고, 저는 저 닮은 쭈구리들과 모여서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요술공주 밍키' 마지막회를 보았습니다. 호텔에서는 기념품도 팔고 있었는데, 그 당시 부모님 선물이라고 이것저것 사곤 했죠. 품질이 조악한 라이터 라든지, 부채나 효자손 같은 물건을 사기도 했는데요, 짖궃은 녀석들은 안마 망치를 사다가 곤히 잠들어 있는 친구들을 뚜들겨서 잠 못 자게 하는 놈들도 있었습니다. 아, 그 때에는 밤잠 안 자고 꼴딱 새고도 팽이처럼 쌩쌩 다녔네요. 물론,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모두 다 깊이 잠들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숙소는 참 열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 반이 몽땅 한 방에서 잠드는 숙소였고, 수돗가에서 대충 세수하고, 탄 맛 나는 카레가 급식으로 나오는… 돈 받아다가 어디다가 써 먹었나 묻고 싶은 숙소였습니다. 고등학교 놈들은 담배 피우는 놈들이나 소주 숨겨 온 놈들 등… 국민학교 시절과는 다른 차원의 말썽이 있었지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급우들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기억에 잘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정도로 수학여행의 의미는 충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벗님님의 댓글
수학여행으로 이제는 가깝게는 제주, 보통은 해외로 나가는 게 일반화되어서 경주는 잘 찾지 않는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는 수학여행과 어른이 되어 다시 찾는 여행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긴 했습니다.
절과 탑의 모습도 달리 보이는 듯 했고, 도공과 목수들이 저걸 만들며 어떠했을까 하는 재밌는 생각들도 담기더군요.
노래도, 책도, 어느 시기에 보고 듣는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고 하더니, 여행도 그러한가 봅니다.
글을 읽으며 오랜 만에 생각났습니다. 비둘기호.. 정말 세상 느린 기차였죠. ^^;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딜리트님의 댓글
제가 생각보다 젊은 축이라고 쿨럭, 쿨럭, 생각했습니다. 쿨럭,
구르는수박님의 댓글
옆 숙소에 남학교가 왔다며 몰래 나가던 아이들도 생각나고요... (잘 만났을까요 ㅋㅋ)
다른건 생각이 잘... 안납니다 ㅋㅋ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저도 어떤 의미로 깜놀했던 것은, 대입 학력고사 끝나고 공부 깨나 한다는 놈들이 다 같이 모여서 맥주 한 잔 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학생이 술 마시면 진짜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만 혼자 깜도 안 되면서 범생이 놀이를 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자괴감, 배신감, 현실 자각 등을 경험했던 기억이었습니다.
아, 저는 지금도 술을 안 마십니다.
불곰님의 댓글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달콤오렌지님의 댓글
그후로 사정이 있어 신혼여행을 번갯불에 콩볶아먹듯 경주로 갔다가 중간에 이른 복귀를 했더랬지요. 그리고는 경주 마지막으로 간게 아들 초2때 친구네 9집과 같이 간 단체 여행이었습니다.
경주까지는 KTX 타고, 경주역에서 쏠라티 2대 렌트해서 쪼매난 애들과 부모 같이 다니는데... 애들도 재밌고 부모들도 재밌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경주 여행이었네요~
Rebirth님의 댓글
저는 여행지는 나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10대는 바닥을 보고 다녔고,
20대는 이성을 보고 다녔습니다.
30대는 달력을 보고 다녔고,
40대에야 가족을 보고 다녔습니다.
이제 50대가 되면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을까요?
^^;;
10대부터 다녔던 경주 불국사를
50된 이제야 다시 고개들어 보며 풍경을 즐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