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
블랙 도브 - 러브 액추얼리의 진짜 후속편, 그런데 이제 낭자한 피를 살짝 곁들인.
miseryrunsfast

Lv.1 miseryrunsfast (125.♡.247.246)

2025년 7월 8일 PM 01:11 · 수정됨(07. 10. 16:10)

조회 1,451 공감 0


그런데... [러브 액추얼리]의 줄리엣이 스파이라면?


넷플릭스의 6회 분량의 드라마 [블랙 도브]는 분명 액션 드라마입니다. 스파이가 나오고,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형 스파이가 주인공이죠. 돈을 많이 주는 곳에 정보를 파는 중개상으로서의 스파이입니다. 스포일러는 자제해야 하니 스토리는 크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1화 절반 기준의 스포일러만 하도록 하죠. 아예 이야기를 안 하면 이 글의 주제를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까요.  

주연 배우는 두 명입니다. 여자주인공은 헬렌 웹, 배우는 키이라 나이틀리입니다. 키이라 나이틀리야 연기력을 이미 인정받은 배우고, 예쁜 역 보다는 매력적인 역에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을 받는 것이 일반적 인상이긴 한 것 같습니다. 헬렌 웹은 10년 동안 스파이로, 자신의 목표에 접근했다가 그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고 쌍둥이를 낳았죠. 결혼 10년차의 국방부장관 아내입니다. 대체로 행복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중성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죠. 

남자주인공은 샘 영, 배우는 벤 위쇼입니다. 이쪽은 살인청부업자, '트리거맨' 입니다. 벤 위쇼 역시 연기력으로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타이틀 롤을 맡을만한 배우죠. 샘 영은 트리거맨으로 사는 것에 딱히 윤리적 갈등을 겪지는 않습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윤리적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대로만 일을 합니다. 그는 게이이고, 그 삶에 충실했지만, 자신의 일과 자신의 직업 윤리가 충돌하는 바람에 7년간 런던을 떠나 있었죠. 

크리스마스를 일 주일 앞둔 어느 날 밤, 어떤 3류 타블로이드지 기자, 어떤 귀금속상에서 일하는 직원, 그리고 헬렌 웹이 바람을 피우던 남자가 동시에 암살당하면서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이들을 누가 왜 죽였는가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중심축이고, 이 이야기는 느리게 굴러갑니다. 액션 영화 또는 서스펜스 영화로 보면 한 시간 반짜리 영화 한 편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블랙 도브]의 장점은 서스펜스가 아닙니다. 드라마죠. 두 주인공은 이 상황에 휘말리지만, 동시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휘말립니다. 스포일러가 되기 떄문에 더 자세히 쓰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이 두 주인공의 살아온 삶이 지금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아주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OTT 시대의 스토리텔링의 장점(과 약점) 을 보여주는 


OTT로 시장이 넘어왔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관에 가던 시대가 끝났다고도 할 수 있죠. 큰 스크린에 대한 소구야 여전히 있고, 그것이 주는 감동 역시 따로 있습니다만, 그 감동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의 허들이 높아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문화소비에 있어 허들의 높이는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제 인생을 놓고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알바비를 모아 처음 산 소니 WF-707 (707만 기억나서 찾아봤네요) 이 제 노력의 첫 허들이었죠. 그 전에도 영화관에 가기 위해(국내에 불법 개봉했던 [폭풍소년] - 그러니까 [아키라]를 보려), 오락실에 가기 위해 용돈을 요구하는 허들이야 있었습니다만, 그 허들과 워크맨을 사는 허들은 확실히 다르죠. 

OTT의 핵심은 이 허들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휴대하며 어디서나 영상을 소비한다는 개념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저도 구도심 초기에 어떤 제품들의 개발에 자문 등으로 관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떄의 기기들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죠. 우선 (1) 영상 파일을 구하는 문제부터, (2) 그 영상 파일을 보관하고, (3) 그걸 휴대용 기기로 옮기고 하는 과정이죠. OTT는 개념적으로 이 요소들을 세상에 깔린 기술을 기반으로 단순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이 소비 시장의 크기를 키우는 데 성공했죠. 

[블랙 도브]는 OTT여서 가능한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스파이가 나오는 작품이라면 대단한 능력, 엄청난 전투력이 있어야 할 텐데,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의 무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 드라마의 액션 파트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매우 절제된 연출이고, 나쁘게 말하면 간지가 하나도 안 납니다. OTT의 액션 장면들이 점점 진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블랙 도브]는 액션 면으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주인공들의 전투력은 높게 설정되어 있지만 최강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제이슨 본처럼 리얼리스틱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게 드라마로서의 약점인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만든 액션' 같은 말은 붙일 수 없겟지요. 

제가 보는 관점에서,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OTT의 장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화로 풀기에는 복잡한 '이야기'를 - 스토리가 아니라 - 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드라마 [블랙 도브]에서도 이 방식은 아주 잘 작동하는데, 이야기 중 한 편은 헬렌 웹, 한 편은 샘 영을 위해 할애됩니다. 하지만 이 한 편이 설명충으로서의 스토리에 집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이들이 어떤 태도와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이들의 행동의 당위성을 만들어내죠.

이는 일반적으로 한 주 한 편이 공개돠는 방식의 드라마와는 다릅니다. OTT는 동시에 공개되고, 등장인물들의 배경 이야기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섯 편으로 만들어진 [블랙 도브]는 시즌 1의 2화까지는 한 번에 봐야 이후 이야기를 따라가기 수월해집니다. 이 동안 스토리는 그 나름대로 느리게 굴러가지만, 주인공들과 그들 주변의 이야기는 세차게 굴러갑니다. 

OTT의 장점 두 번째는 그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날실과 씨실로 꿰어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훌륭한 볼륨을 가지고 있으면 스토리는 조금 빈약해도 넘어갑니다.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합니다. 주인공들의 적은 끝에서야 희미하게 드러나고, 깔끔하게 끝나지도 않습니다.공개 몇 달 전에 이미 시즌 2가 확정되었으므로 아마 일부러라도 이렇게 만들었겠지요. 하지만 서스펜스의 근간으로서의 스토리는 그다지 강점이 아닙니다. 그런데, 각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로 극이 굴러갑니다. 그것도, 아주 잘. 

[블랙 도브]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아마 적당한 수준의 B급 액션 영화의 꼴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진짜 핵심은 각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아있는가이고,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스토리의 약점들은 여전히 신경쓰이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큰 약점이 되지 않습니다. 


[러브 액추얼리]의 진짜 후속편, 그런데 이제 낭자한 피를 '살짝' 곁들인. 


이런 OTT의 장점이 [블랙 도브]에는 잘 드러나 있습니다. 비슷한 느낌으로는 애플 TV의 걸작 [슬로 호시스]가 있을 텐데, [슬로 호시스]가 꿈도 희망도 없는 비참한 현실에 근간한다면, [블랙 도브]는... [러브 액추얼리] 입니다. [블랙 도브]의 모든 등장인물은 어쩄든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에서 움직입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이자,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인데, 이 드라마의 모든 인물은 자신의 상황과 관계, 자신이 만든 원칙에 입각하여 움직입니다. 이 느낌을 저는 [슬로 호시스]에서 받았었고, 제 최애 드라마 리스트에 당당히 들어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기에 [블랙 도브]를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시즌이 계속되며 이 정도의 밀도를 유지해 줄 수 있을까는 아직 모르겠지만, 배우들의 면면 - 꼭 주연들 뿐만 아니라, 조연들까지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을 볼 때, 별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이정도로 기대되는 세계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이 드라마의 배경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크리스마스 1주일 전부터 1주일간의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옵니다. 자연스럽게 [러브 액추얼리]를 떠올리게 되죠. [러브 액추얼리] 에서 키이라 나이틀리는 스케치북으로 '받으면 안 될 고백을 받는' 줄리엣이었고, [블랙 도브]에서는 '하면 안 될 일을 하는' 헬렌입니다. 줄리엣과 헬렌은 모두 꼬인 상황을 마주해야 하지만, 줄리엣은 상황을 받아들이나 이후는 열린 결말인 데 비해, 헬렌은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려 합니다. 자신이 지킬 것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래도 이 드라마의 진 주인공은, 적어도 시즌 1에서는 샘 영, 그러니까 배우 벤 위쇼입니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이 세계의 중심을 잡을 때, 샘 영은 이 세계의 스토리를 실제로 끌고나가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샘 영은 온전한 - 완벽한 - 액션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니고, 그 역시 흔들리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상황이 가장 크게 변화하는 인물이 되죠. 상황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결론으로, 이 드라마는 여섯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스토리가 빠른 호흡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풍부하고,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작게든 크게든 가지고 있습니다. 조연들의 입장이나 상황, 그리고 그들의 행동들은 모두 그 나름의 당위성을 가집니다. 그것들이 모여 완전한 스토리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 지점이 아쉽습니다만, 만약 그랬다면 제가 이런 글을 쓸 필요도 별로 없었겠지요. 


고전 첩보 소설의 OTT로의 전환의 사례 


[블랙 도브]를 보며 저는 오래간만에 고전 첩보물을 읽는 기분을 느끼며 봤습니다. 중간중간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되돌려가며 보기도 했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일이 아주 쉽지만, 영상물에서는 이러기가 쉽지 않죠. 대부분의 영상물들은 이 이야기를 순서대로 깔끔하게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시간을 조절하고 타이밍을 잽니다. 소설 작룸들은 이런 면에서 읽는 사람이 속도를 설정하며 읽어나가기 때문에, 어떤 지점들은 빠르고, 어떤 지점들은 느리게 읽어나가며 자신의 감각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위대한 소설가이자 위대한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하신 말씀이 있지요. 자신의 소설 [장미의 이름] 초반의 100페이지를 일부러 느리고 지겹게 썼노라고 말하면서, '산에 갈 때는 산의 호흡에 나를 맞춰야 하고, 이 소설의 초반부가 그렇다' 고요. [블랙 도브]는 이런 자기 스토리의 호흡을 가지고 있고, 그 호흡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풍성한 이야기들이 스토리를 끌고 가는, 잘 쓰여진 소설의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느낌이 좋은 드라마의 호흡인가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의문은 이 IP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따라 결론을 낼 수 있겠지요. 가장 더울 때 한겨울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나름 즐거웠습니다. 물론, 에어컨을 최대한 빵빵하게 켜두고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8/10. [슬로 호시스]를 좋아한다면 필견. 고전 첩보물의 팬이라면 볼 가치 있음. 액션물로서는 그다지. 

댓글 (2)

  • 나만나처럼 Lv.1

    25.07.09 · 211.♡.139.81

    리뷰 잘 봤습니다.
    저도 찜해놓고 있다 지난주부터 어제까지 후루룩 봤네요. 스토리가 아주 매끄럽진 않다 생각이 들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그런가 재미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런던이 가보고 싶어지는 드라마기도 했습니다.
  • 간큰남자

    간큰남자 Lv.1

    25.07.10 · 220.♡.251.117

    고맙습니다.
    한번 꼭 보아야겠군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