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페이지] 첫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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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벗님 106.♡.231.242
작성일 2024.09.09 15:47
분류 한페이지
48 조회
1 추천

본문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났다 했었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 했었어.

내가 걷는 걸음이 하나의 역사가 되고 신화로 되어 갔었지.

어떤 이들은 나를 시기 질투했었어.

이미 잘 깔린 비단길을 걸었다나, 다 모르는 소리들이지.

뒤돌아보고 이러쿵저러쿵, 그들이 뭘 알겠어.

지독하리만치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을 말이야.

맞아, 어떻게 보면 신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지.

멋 드려진 결과물들이 내 대답을 대신 할 테지.

실패하고 좌절하고, 뜬 눈으로 날밤을 새우며

어금니가 부서져라 안간힘을 썼던 그 순간들을 그들은 알 수 없으니까.

말 그대로 나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영웅처럼 보였으려나.


흥망성쇠라 하던가.

지금 보면 다 부질없는 거야.

결론이 나질 않으면

그 자리에서 지독하게 매진한 덕분에 얻게 된 온몸 곳곳에 지병들,

아주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말이야.

그 시절은 그걸 몰랐어.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지.

그래, 착각이야, 착각.

그렇게 한 걸음을 조금 더 빨리 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남들보다 더 빨리, 남들보다 더 많이..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었나.


언젠가 회고록을 쓰고 싶었어.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정말 눈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밌는 그런

내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그런 회고록 말이야.

하지만 쓰질 못했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데,

그때가 그 기회라는 걸 몰랐지.

아직 나는 할 게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다음 주, 다음 달이 되면 또 얼마나 멋진 성과를 낼지 모르니까,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구먼.


가만.. 전에는 참 꿈도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지.

이 두 주먹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힘이 부족하면, 내 어깨를 받쳐주고 내 다리에 힘을 실어주는

우리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정말 못 할 게 없었지. 하려고 했던 건 다 하지 않았었나.

이 정도면 정말.. 다 이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말이야.

결국은 혼자 떠나야 하는 법이지. 혼자 왔으니, 혼자 가는 게지.

이건 뭔가 대체할 방법도 없고, 요령도 없어.

그저.. 왔으니 맞이할 수밖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좀 순한 친구였으면 좋겠어, 순한 친구.

이건 처음이다 보니, 마음 편한 길동무였으면 좋겠어.

지금은 그 바람 하나뿐이야.

자.. 떠나세.



  자식도,

  부모도,

  일가친척들조차도

  죽음에 이른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28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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