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페이지] 첫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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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났다 했었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 했었어.
내가 걷는 걸음이 하나의 역사가 되고 신화로 되어 갔었지.
어떤 이들은 나를 시기 질투했었어.
이미 잘 깔린 비단길을 걸었다나, 다 모르는 소리들이지.
뒤돌아보고 이러쿵저러쿵, 그들이 뭘 알겠어.
지독하리만치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을 말이야.
맞아, 어떻게 보면 신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지.
멋 드려진 결과물들이 내 대답을 대신 할 테지.
실패하고 좌절하고, 뜬 눈으로 날밤을 새우며
어금니가 부서져라 안간힘을 썼던 그 순간들을 그들은 알 수 없으니까.
말 그대로 나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영웅처럼 보였으려나.
흥망성쇠라 하던가.
지금 보면 다 부질없는 거야.
결론이 나질 않으면
그 자리에서 지독하게 매진한 덕분에 얻게 된 온몸 곳곳에 지병들,
아주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말이야.
그 시절은 그걸 몰랐어.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지.
그래, 착각이야, 착각.
그렇게 한 걸음을 조금 더 빨리 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남들보다 더 빨리, 남들보다 더 많이..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었나.
언젠가 회고록을 쓰고 싶었어.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정말 눈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밌는 그런
내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그런 회고록 말이야.
하지만 쓰질 못했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데,
그때가 그 기회라는 걸 몰랐지.
아직 나는 할 게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다음 주, 다음 달이 되면 또 얼마나 멋진 성과를 낼지 모르니까,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구먼.
가만.. 전에는 참 꿈도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지.
이 두 주먹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힘이 부족하면, 내 어깨를 받쳐주고 내 다리에 힘을 실어주는
우리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정말 못 할 게 없었지. 하려고 했던 건 다 하지 않았었나.
이 정도면 정말.. 다 이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말이야.
결국은 혼자 떠나야 하는 법이지. 혼자 왔으니, 혼자 가는 게지.
이건 뭔가 대체할 방법도 없고, 요령도 없어.
그저.. 왔으니 맞이할 수밖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좀 순한 친구였으면 좋겠어, 순한 친구.
이건 처음이다 보니, 마음 편한 길동무였으면 좋겠어.
지금은 그 바람 하나뿐이야.
자.. 떠나세.
자식도,
부모도,
일가친척들조차도
죽음에 이른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28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