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페이지] 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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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준비됐어요?"
도리질을 쳤다. 식은 땀방울이 맨눈으로 줄줄줄 흘렀다.
붉게 출혈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는 아니지 않은가.
"아직이요?"
사내는 손목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니 갸웃거렸다.
시침과 분침 외에는 아무 것도 표시되지 않은 극한의 미니멀리즘의 전자 시계.
"흠.. 그럼 언제까지? 좋아요, 1분. 그 정도면 괜찮죠?"
사내는 들고 있던 기계를 내려놓고는 손목 시계를 톡톡 터치했다.
1분 타이머.
몇 걸음을 걸어 쇠사슬이 잠긴 물을 열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목음 깊이 빨아드리고는 내뿜는다. 하얀 빛줄기 사이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저씨? 아저씨도 피우실래요?"
사내가 고개를 돌려 한 번 쓱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린다.
"안 피우시나.."
기억이 나는 것은 자동차를 내릴 때였다. 함성 소리 같은 게 들렸던 것 같은데,
뒤통수의 통증이 짧게 느껴졌다. 어디 부딪친 것인가, 가격을 당한 것인가.
암전, 실신..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렇게 의자에 묶여 있다.
콧구멍을 간신히 남기고 입과 턱은 몇 겹으로 단단하게 테이프가 감겨 있다.
최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납치와 감금. 이건 여전히 수 십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극초단파로 뇌파를 점거해버릴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저렴한 것일까.
저 납치범은 아직 아무런 요구사항도 제시하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협상을 할 거 아닌가, 내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협상 정도는.
사내는 담배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는 운동화로 비벼 끈다.
성큼 성큼 걸어온 사내는 자신의 전자 시계를 보여준다. 시계 전면이 주황색으로 번쩍인다.
"보이죠? 1분. 저 충분히 시간을 들였어요."
사내가 육중한 기계를 집어든다. 일방적으로 내게 선사한 1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기계가 육중한 소리를 낸다. 사내는 몇 번 터치한다. 작동 절차가 복잡하지는 않는 듯 하다.
내 뒤통수로 그 기계가 다가온다. 은은한 열기가 퍼진다.
"아저씨, 괜찮아요. 몇 번 해봤어요. 조금 따끔거릴 겁니다."
기계는 뒤통수를 붙잡더니 몇 개의 전극이 순식간에 달라붙는다.
귓구멍 속으로도 엷은 전선이 몇 가닥 들러붙는다. 거머리, 수 십 마리의 거머리 같다.
"자.. 이제 뽑아드립니다. 아저씨, 바이 바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