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남산동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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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2024.06.30 18:23
813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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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동기로 쉬고 싶었다는 말은 너무 흔해서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 10여년만에 출근도 접속도 필요 없는 한 달의 재충전 프로그램을 신청한 이유는 그것 말고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볍고 깊은 휴식 시간은 어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여수에서 일주일 혼자 살기를 시작했습니다.

너무 떠들썩한 곳은 외롭습니다. 그 무리에 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호젓하면 혼자서 끼니와 간식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한편, 아무리 꾸며도 아파트나 오피스텔은 갑갑한 기분이고, 멋진 저택은 비용이... 결국 취향 따라 관광지 근처이면서도 조용한 바닷가 언덕 골목길 어느 집을 골랐습니다.


여행 첫날에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미리 일기예보에서 7일간 이어지는 우산을 봐 두길 잘했습니다. 비를 뚫고 네시간 남짓 운전해 짐을 들여놓는 그 순간에 아마 가장 심하게 쏟아졌을 겁니다. 정신 없던 첫날은 지났고, 이제 둘째 날 저녁입니다. 오후에 잠깐 그쳤지만 비는 또다시 오락가락 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책 읽고 음악 들으며 마음 가는대로 생각할 뿐이니 축축한 바람도 시원합니다.

아무 준비를 안 했을 리는 없지요. 달초에 데이터 한도가 두 배인 요금제로 바꿨습니다. 읽고 싶은 전자책을 구매/대여했습니다. 출발 직전에는 봤으면 하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USB 메모리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종이로 된 책도 한 권 사서 어제까지 펼치지 않다가 오늘, 돌산대교가 보이는 카페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이 쓸모없는 생명이 약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머리 쓰는 방법을 거절하고 단지 독창적인 방법이 필요 없는 문자 작업이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일찌감치 끝내는 것이다." (구추백, 부질없는 이야기, 25쪽)

아이러니한 것은, 이 '쓸모없는 생명'이 1920년대 중국 공산당의 영수를 지냈고, 노신 등과 활동하며 지금까지 읽히는 글을 썼다는 거죠. 36세로 짧은 생을 마치기 전까지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박사 학위를 마치고 취업한 나이가 38세입니다. 격동기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

골목길에서 눈을 마주쳤던 고양이가 조금 전 마당을 스윽 지나갔습니다. 대문은 잠겼지만 의미 없었나 보네요. 커다란 TV가 있습니다만 지금은 얕은 담장과 긴 처마가 열어 놓은 하늘과 바다를 켜 놓고 글을 씁니다. 뉴스를 안 보면, 답답한 소식을 듣지 않으면, 미칠 듯이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어떤 때는 듣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 없이 제멋대로 몇 마디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위의 책, 15쪽)

여수 여행이 처음은 아니라 딱히 어디를 가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맛집은 여기 '앙지도'의 도움을 받아 어제 저녁 식사를 잘 해결했습니다. 다만, 근사한 메뉴에는 '2인 이상 주문'의 결계가 쳐진 곳이 많네요. 어쩔 수 없지요. 매일 외식하다간 감당 못할 것 같아 쌀도 가져왔고 간단히 장도 봐뒀습니다.

일요일 저녁, 슬슬 일상으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마도 잊지 못할 특별한 일상을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 인터넷 커뮤니티를 삶의 일부로 써 왔지만 이런 얘기를 막 100일을 맞이하는 다모앙 자유게시판에 올릴 수 있어서 기쁘고 한편으로 설렙니다.


댓글 12 / 1 페이지

루네트님의 댓글

작성자 루네트 (175.♡.133.110)
작성일 06.30 18:40
풍경이 넘 좋습니다.

느린시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06.30 20:00
@루네트님에게 답글 이런 계단 골목도 만날 수 있는, 어촌 마을의 친근한 풍경이라 더 좋습니다

jameslee님의 댓글

작성자 jameslee (175.♡.37.119)
작성일 06.30 19:03
자유 인가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진 좋네요.

느린시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06.30 20:03
@jameslee님에게 답글 아무 것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점은 자유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건 부담이죠 ^^;

루드윅님의 댓글

작성자 루드윅 (58.♡.202.187)
작성일 06.30 19:11
여수 또 가고 싶네요 ㅎㅎ

느린시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06.30 20:07
@루드윅님에게 답글 저는 10년만의 재방문입니다. 그동안 또 가고 싶다는 생각만 여러번 했죠.

PWL⠀님의 댓글

작성자 PWL⠀ (211.♡.50.177)
작성일 06.30 19:20
사진과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느린시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06.30 20:10
@PWL⠀님에게 답글 감사까지는... 예전 같으면 블로그에 올렸겠지만 다 귀찮아져서요. 다모앙이 지금 100일이지만 앞으로 백년은 갈거라 믿고 올립니다.

일리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일리케 (119.♡.235.48)
작성일 06.30 19:47
사진 찍은 그곳에서 일이분 거리에 1980~1982년까지 살았던 저희집이 있을듯 하네요 ㅠㅠㅠ

느린시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06.30 20:22
@일리케님에게 답글 당머리마을에 사셨나봐요. 여행객의 감상과 주민의 삶은 다르지만 추억의 기회가 되었길 바랍니다.

곽철용님의 댓글

작성자 곽철용 (124.♡.58.111)
작성일 06.30 22:59
이 언덕에 외할머니댁이 있었습니다. 사진으로나마 반갑네요!

느린시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느린시간 (118.♡.251.213)
작성일 07.01 09:01
@곽철용님에게 답글 저도 외갓집이 삼천포 바닷가여서 어릴 때 자주 놀러갔어요. 반가움을 전할 수 있어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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