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시절의 이슬람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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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코미 89.♡.101.61
작성일 2024.08.27 11:46
1,372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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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세기 이스탄불의 한 남자가 심하게 열병이 났습니다.

 그는 울라마(이슬람교의 법학자)에게 자신이 목숨을 건진다면 어린 소년들과 동성애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리고 살아났죠.

 살아난 남자는 막상 살아나니 아쉬워졌지만, 신과 한 약속을 어길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유태교의 랍비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랍비는 그 남자에게 여자랑 관계를 맺으라고 조언했죠.


2. 튀르크인들은 항해 준비를 마치고 나면 동방정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에게 와 바다에 신의 축성이 내려졌는지 물었습니다.

만약 축성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은 배를 띄우지 않았고, 축성이 내려지면 배를 띄웠습니다.

- 유럽 여행자의 기록 


3. 언젠가 한 프랑스인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튀르크인이 그에게 조언하길, '성모 마리아에게 빌어보시오' 라 했습니다.

프랑스인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자신이 빈에 포로로 잡혀있을때 성모 마리아에게 빌면 효험이 있단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 영국인 노예들이 배에 오르자 튀르크군은 무슨 종교를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가톨릭을 믿는다고하자, 튀르크군은 가톨릭을 버리고 이슬람을 믿는게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노예들이 거부하자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선책으로 개신교라도 믿으라고 말하고서는 

선실을 예배실로 개조해 주기적으로 그곳에서 기도를 올리게 했습니다.

- 영국 노예의 증언 

(가톨릭은 성상과 성화등의 상징을 써서 그걸 우상숭배로 여기는 이슬람은 가톨릭을 썩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그런 상징을 쓰지 않으므로 상대적으로 좋게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5. 1872년 에디르네에서 흡혈귀가 나타나자 이슬람 성직자와 기독교 성직자 모두 퇴치에 나섰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튀르크족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시켰고, 겨우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6. 미신이 만연한 발칸 지역에서는 성직자들이 많은 부적을 써줬는데,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성직자로부터 받은 부적이 효험이 없다고 생각되면 무슬림 성직자에게 가서 부적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7.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살며 논쟁이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둘 중 어느것이 더 좋은 종교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나가고, 일요일엔 교회에 나간다.

- 레이디 몬태규 

8.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무슬림들입니다. 

  - 무슨 종교를 묻느냐는 레이디 몬태규의 질문에 성호를 그으며 답하는 마케도니아의 농부들. 

9. 키프로스 출신의 한 기독교도 농민은 자신의 아들에게서 소를 판 돈을 받지 못하자, 그를 샤리아 법원(이슬람 율법으로 운영되는 법원)에 고소하고 샤리아에 따라 돈을 받도록 조치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0. 

튀르크인과 불가리아인은 사이좋게 지냈다. 

튀르크인들 집에 인접해 살던 불가리아 마을 아낙네들은 튀르크인 아낙네들과 이웃사촌처럼 지냈다.

아이들도 불가리아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튀르크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튀르크인 아녀자들은 불가리아어를 잘 구사했으며, 

불가리아인들도 튀르크어를 아이들만큼은 쓸 줄 알았고 그 결과 일종의 방언같은것이 만들어졌다. 

불가리아인 가정에서 일하는 튀르크인들은 그 가정의 절친한 친구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우리는 튀르크인들에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튀르크인이 된건 아니었다. 

우리는 불가리아식으로 살았고, 불가리아 의복을 입었으며, 불가리아의 관습과 불가리아의 신앙을 믿었다.

튀르크인들도 물론 그들 방식대로 살면서 그들 의복을 입었고, 그들 관습과 그들 신앙을 지켜갔다. 

우리는 이 모든것을 사물의 이치로 받아들였다. 

- 1870년대를 회고한 불가리아인의 기록. 


출처 : 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을유문화사.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피지배층의 종교와 문화에는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인정해 줬습니다. 그걸 밀레트 제도라고 하죠.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혼란시키기 위해 영국은 로렌스를 파견해 사이비 취급받던 근본주의 와히비즘 꼴통들을 자극해 봉기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댓글 7 / 1 페이지

둠칫두둠칫님의 댓글

작성자 둠칫두둠칫 (117.♡.14.7)
작성일 08.27 11:54
역시 세상 흉측한 일들의 배후는 다 영국이군요.

민초맛치약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민초맛치약 (121.♡.158.210)
작성일 08.27 12:04
@둠칫두둠칫님에게 답글 우리나라 한정해서는 일본이죠. 섬나라 놈들이 유별나게 추접 드럽죠.

RubyBlood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RubyBlood (220.♡.82.222)
작성일 08.27 12:45
@민초맛치약님에게 답글 역시..
섬나라가 문제 네요 ㅎㅎ

민초맛치약님의 댓글

작성자 민초맛치약 (121.♡.158.210)
작성일 08.27 12:03
역시 브리티시 놈들....

저런 걸 보면 중동이나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민주주의를 싫어할 이유를 서방 1세계 강대국들이 제공했다고 봐야 합니다. 현지인들 입장에서 민주주의는 백인 강대국 국민들이, 자신들을 침략 수탈하겠다는 정치인들을 선출하는 행위이자 사상으로 보일 겁니다.

트라팔가야님의 댓글

작성자 트라팔가야 (58.♡.217.6)
작성일 08.27 12:17
이 글은 사실과 허구를 혼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 가지 사실이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다른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밀레트 제도**: 이 부분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섞여 있는 거대한 제국이었으며, 각 종교 공동체(밀레트)의 자치를 어느 정도 허용했습니다. 이는 제국 내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공존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2. **영국과 로렌스, 와하비즘**: 이 부분은 허구적인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아랍 봉기를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E. Lawrence,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와하비즘과 관련된 운동을 자극한 것이 아닙니다.

  와하비즘은 18세기 중반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으로, 알 사우드 가문과 연합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로렌스가 지원한 봉기는 하심가(House of Hashim)와 관련된 것으로, 와하비즘과는 무관합니다. 영국은 아랍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게 했으며, 와하비즘과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역사적 사실과 잘못된 정보를 섞어 놓은 것입니다.

코쿠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코쿠 (121.♡.203.142)
작성일 08.27 13:26
@트라팔가야님에게 답글 챗지피티에 돌린건가요? 본인생각인가요?

Usta님의 댓글

작성자 Usta (88.♡.58.120)
작성일 08.27 16:15
출처부터 댓글까지 혼란스럽네요.
어디서 부터 말해야할지 답도 없어서

이분은 클리앙때도 그러더니
정보의 진위를 모르고 그냥 책에 쓰여서
맞다 한다면
현재 친일매국 필름이나 책들도
차후에 진리인냥 호도되겠죠.

사람들은 진리나 사실보다 그럴사한 가십을 좋아하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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