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뇌경색으로 응급실 걸어들어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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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2024.09.0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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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에 뇌경색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를 하려는데 왼손에 든 물컵이 입까지 안 올려지는 겁니다.

잠을 잘못 잤나... 하면서 반대 손으로 입을 행궜습니다.


집을 나와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빨리 걸을 수가 없는 겁니다.

옆에 부동산 창문으로 보니까 제가 왼쪽 다리를 끌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바로 병원을 가볼까 일단 출근해서 계속 이상하면 갈까...

그때가 아침 7시 40분쯤 됐을 땐데, 회사까지는 지하철로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지하철 역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한 20분 고민하다가, 회사에 문자 보내고 병원을 먼저 들르기로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왼쪽에 담이 온 건줄 알고 신경외과를 검색했습니다.

뇌졸중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땐 아직 30대였거든요. 신경외과나 한의원 가서 물리치료나 받고 출근하려 했죠.

검색해 봤더니 신경외과는 없고, 지하철역 근처에 신경과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가 8시 무렵이었는데, 병원 가봐야 아직 문도 안 열었는데 어떡하지.. 하다가 무작정 가봤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의사선생님이 먼저 출근해 계시더라고요.

병원 아직 안 열었는데 어떻게 오셨냐고 하시길래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서류 써줄테니까 종합병원을 가라는 겁니다.

무슨 서류인지 보지도 않고 지하철역 세 정거장 떨어진 병원으로 갔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종합병원으로 걸어가며서 와이프한테 전화를 했는데, 제 말이 진짜 어눌했답니다.

불과 몇십분 전 동네 신경과에서는 말 잘 했었거든요.

순간순간 나빠지고 있었던 거죠.


처음에는 일반외래로 가서 서류를 줬더니, 갑자기 휠체어를 태우는 겁니다.

그렇게 응급실로 옮겨져서 침대에 누운 뒤로 한 열흘 동안 침대를 못 내려왔습니다.

응급실 가서야 제 소견서에 쓰여진 게 뇌졸중, 정확히는 뇌경색 소견임을 알았죠.


응급실에서 간단한 사지 운동 확인 후 제모하고 조영제를 맞았습니다.

사타구니 아래에 주사를 꽂고 조영제가 들어가는데,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머리에서 좌우를 넘어갈 때는 눈도 한번 번쩍하고요.

그때 그 조영으로 제 오른쪽 뇌혈관을 막고 있던 혈전은 뚫렸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올라가더군요.


병원에선 운 좋은 줄 알라고, 뇌졸중으로 응급실 오시는 분 중 저처럼 제발로 걸어서 오는 경우는 진짜 드물다고 하더군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일반병실 가보고 진짜 큰일 날 뻔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맞은 편에 계시던 분이 아파트 경비 일을 하셨는데, 밤에 혼자 숙직하다가 뇌졸중이 오셨다더라고요. 아침 8시에 발견됐을 때는 이미 오른쪽 반신마비 상태였답니다.

가족은 없고 간병인이 계셨는데, 환자 거동이 불편하니까 막 욕을 하면서 몸을 돌리는 겁니다. 환자분은 말도 못하고 거동도 불편하니까 그냥 다 당하고요.


이분이 밤에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해서 잘 들어보니까 나름 신세 한탄을 하시는 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입이 잘 안 움직여지니까 발음이 하나도 안 되고, 무슨 짐승 울음 소리 같은 것만 나더라고요.

밤새 그분 푸념 들으면서 정말 무서웠습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완쾌해서(약은 매일 먹지만) 일상 생활 잘 하고 있지만, 가끔 그때 생각하면 섬뜩합니다.

그때 동네 병원으로 바로 안 가고 출근했다가 쓰러졌으면...

동네 병원에 마침 의사선생님이 없었으면...

반대로 혈전이 제가 한참 잠들어 있을 때 막혀서, 일어났을 때 이미 수 시간이 지나 있었으면...

모든 경우의 수가 떠오를 때마다 제가 진짜 운이 좋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순간순간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 "혼자 전화걸어서 문의할 수 있으면 중증 아님"이라는 복지부 차관 얘길 듣고 생각나서 써봤습니다.

댓글 61 / 2 페이지

교만하지않기님의 댓글

작성자 교만하지않기 (117.♡.21.6)
작성일 09.04 19:20
정말 좋은 내용 감사드립니다!!

heavyrain3637님의 댓글

작성자 heavyrain3637 (221.♡.166.119)
작성일 09.04 19:51
경험 감사합니다. 저도 저나 주변을 잘 살펴봐야 겠네요~

luqu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luqu (218.♡.215.30)
작성일 09.04 19:56
안그래도 옆동네에서 며칠 전에 뇌경색 와서 똑같이 직접 병원가서 진단 받고 바로 입원하신 분이 글 읽었는데
정말 천운이셨네요.
https://www.ddanzi.com/free/818901095
https://www.ddanzi.com/free/818910938
이런데 복지부차관이란 인간이 전화할 수 있으면 경증이라니 진짜 미친 거 같아요.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09.05 14:17
@luqu님에게 답글 이분도 큰일 날 뻔 하셨네요.
제가 간 종합병원에서는 볼펜 주면서 왼손 엄지와 검지로 잡아보라고 했는데 계속 떨어뜨렸어요.

루나님의 댓글

작성자 루나 (223.♡.79.120)
작성일 09.04 20:54
진짜 하늘이 도움겁니다. 저희 장인어른은 증상이 나타났을때 한의원가서 침밎고 오셨답니다. 시골 한의원이라 그런지 증상도 못 알아채고 그냥 침민 놔주고 돌려보냈다더군요. 그러고 동네병원 가보기려다 고모부께서 이야기 듣고 바로 오셔서 모시고 응급실 갔는데 이미 늦은상태였답다. 동내병원 선생님도 진료와 대처를 잘 해주셨고 정말 제 2의 삶을 사시는 기분이겠습니다. 축하드려요 진심으로.
저도 지금 몸이 많이 아픈데 그래도 위험한 부위를 덜 위험하게 다쳐서? 회복도 빠른편이고 그렇습니다. 뭔가 밀하다보니 결론이 안나네요 아무튼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09.05 14:19
@루나님에게 답글 감사합니다.
저도 바로 전날 자정에 퇴근했는데 오른쪽 목 뒤가 굉장히 뻐근했어요.
그땐 오래 일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게 뇌졸중 전조증상이었더라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요...

Lasido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Lasido (223.♡.219.253)
작성일 09.04 20:58
신경외과 입원실은 무섭죠.  혼자 거동 하시는 분이 드물고…..

제가 본 것은.. 환자인 남편과 보호자인 아내. 여자보다 큰 남자를 드는것 까지는 아니어도.. 남편 몸을 어찌어찌 해야 하는데.. 못해서…. 아내가 젊다면, 어떻게라도 해볼 텐데.. 이런 병은 나이가 든 다음에 오니…. 싱글 여러분 슬퍼하지 마십쇼.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09.05 14:20
@Lasido님에게 답글 본문에 나온 경비분 아드님이 병원에 왔었는데, 표정이 누가 봐도 "아씨 X됐다"라는 표정이더군요.
내 가족에게 저런 눈길을 받으면 많이 슬플 거 같았어요.

오호라님의 댓글

작성자 오호라 (223.♡.90.124)
작성일 09.04 21:35
신경과에서 바로 앰뷸란스 불렀어야 될 상황인거같은데
무사히 응급실 가셔서 다행이네요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09.05 14:23
@오호라님에게 답글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르고
연차 쓴 김에 병원 끝나고 뭐할까 생각하면서 룰루랄라 걸어가던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재현님의 댓글

작성자 재현 (124.♡.77.113)
작성일 09.04 22:54
와...  진짜 상상도 못하겠군요.
행복하고 의미있는 제2의 인생 되시길 기원합니다.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09.05 14:24
@재현님에게 답글 감사합니다.
퇴원하던 날 봤던 하늘 모습을 기억하며 행복하게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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