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의병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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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9.0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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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운 국사책에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이에 항의하는 박승환의 자결과 해산에 반대하는 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고만 아주 간략히 나옵니다. 이런 엉터리 국사책만 보게되면 한 나라의 군대가 총한번 제대로 못쏴보고 나라를 빼앗긴 한심한 조상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겁니다
기록에는 해산된 군인들과 합류한 의병들이 1907-1909년간 경기도와 강원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수많은 교전을 벌였고 그로인해 희생된 의병들 전사자가 무려 일본군기록에만 15000명입니다 독립군기록에는 10만명이라합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분들이 간도로 넘어가서 계속 항일투쟁을 하는거고요
홍범도장군과 독립군의 수많은 희생을 애써 축소하고 안가르려주는 엉터리 국사교과서와 왜라이트의 수작질을 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것은 일본에 나라는 빼았겼지만 우리 조상들은 결코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않았다는 겁니다
경향신문에 의미있는 기사가 있어 퍼왔습니다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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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stku님의 댓글의 댓글
heltant79님의 댓글
오늘날 2번국도의 해남에서 하동까지 구간이 저때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의병분들이 강제노역으로 개설한 도로입니다.
마법사님의 댓글의 댓글
@heltant79님에게 답글
이건 몰랐던 일이네요.
혹시 출처를 아신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혹시 출처를 아신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마법사님에게 답글
아래 링크 참조 부탁 드립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14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 보성 · 낙안 ·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 · 하동까지의 도로작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314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 보성 · 낙안 ·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 · 하동까지의 도로작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heltant79님의 댓글
첫 번째 사진을 찍을 때의 일을 미스터 션샤인에서 드라마로 각색하기도 했죠.
https://www.youtube.com/watch?v=IxOYmpkzpz4
https://www.youtube.com/watch?v=IxOYmpkzpz4
자비님의 댓글의 댓글
@니파님에게 답글
1888년 코닥의 조지 이스트만이 롤 필름을 개발하여 100컷 분량을 코닥 카메라에 내재한 후 판매한 것이 필름 카메라의 시초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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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롤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가 코닥사에 여러 형태였나 봅니다, 무슨 모델명 코닥 카메라가 최초라고 하는게 없으니.... 기존 삼각 다리에 주름 어둠막에 검은 보자기 뒤집어 쒸운 형태의 사진기에도 롤 필름을 장착, 사용 할수 있는 형태로도 만들었나?....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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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롤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가 코닥사에 여러 형태였나 봅니다, 무슨 모델명 코닥 카메라가 최초라고 하는게 없으니.... 기존 삼각 다리에 주름 어둠막에 검은 보자기 뒤집어 쒸운 형태의 사진기에도 롤 필름을 장착, 사용 할수 있는 형태로도 만들었나?.... 싶기도 하네요.
WinterIsComing님의 댓글
왜 나라를 못팔아 먹어서 난리인지? 이해불가 입니다.
FV4030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