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존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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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명 221.♡.235.225
작성일 2024.09.09 11:48
4,676 조회
112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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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자료 정리 하다 보니 이런 글이 있네요.

어디서 저장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댓글 39 / 1 페이지

츄하이하이볼님의 댓글

작성자 츄하이하이볼 (172.♡.95.45)
작성일 2024.09.09 11:50


이런 건가요?

삼진에바님의 댓글

작성자 삼진에바 (182.♡.240.10)
작성일 2024.09.09 11:51
근데 7번부터는 6.25를 생각하면 미묘합니다.
잔존이야 있겠지만 집단거주촌 유지가 쉽지 않을텐데....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Gesserit (125.♡.123.52)
작성일 2024.09.09 12:13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돈 주고 호적을 산다는 것부터 이상하긴 합니다. 모든 가족 연령이 얼추 비슷해야 하지만, 호적이라는 게 어느 한 집안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서요. 당장 부부라면 아내쪽 호적 관계도 있고, 그 자식들 학교 등록 상태 등도 있죠. 그럼 호적을 팔았던 한국인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문제도 있고,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으면 최소한 그 마을에서는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면 자식, 손자 대에는 혼맥을 그에 걸맞는 것으로 찾을텐데, 집안(문중)끼리 비교하는 과정에서 안 걸릴 수 없죠. 80년대까지만 해도 상대방 집안 족보까지 따지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집단 거주촌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본문 내용은 그냥 뇌내망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요.

흰돌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흰돌 (211.♡.49.29)
작성일 2024.09.09 12:37
@Gesserit님에게 답글 그건 통상적인 시대에 해당하는 상황을 그려본 것이고, 잔류 일본인에게 한국전쟁은 신분 세탁을 위한 축복이었다고 합니다. 한반도 전역에서 천만 명 이상이 이동했고 거의 그만큼이 죽었고, 이런 대혼란에서 세밀하게 처리했다면 족보 사고 족보 세탁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Gesserit (125.♡.123.52)
작성일 2024.09.09 13:06
@흰돌님에게 답글 흔히 하는 착각인데, 족보를 산다고 곧장 양반 후손이 되거나 그 지위를 대내외적으록 공인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집성촌 중심으로 내려온 문중 제례에 계속 참석했던 사람들 중심으로 끈끈하게 이어지고, 또 여러 경로로 정말 그 집안 사람인지 하는 것이 체크되었거든요. 신분 세탁이라는 것도 혼자서는 어떻게 가능했을지 몰라도, 제대로 부를 축적한 상태였으면 가족도 거느리고 있었을테니 호적 하나를 몰래 획득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죠. 본인 및 자식의 학적, 본적, 처가 호적, 토지대장 등 문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아무리 해방 직후 또는 전쟁 시기였다고 해도 그 정도로 허술했던 행정 체계가 아니었고요. 물론, 신분세탁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본문 내용처럼 흔했다고 하는 가정은 상당한 무리라고 봅니다.

하늘빛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하늘빛 (121.♡.203.152)
작성일 2024.09.09 15:01
@Gesserit님에게 답글 이미 임난 이후부터 공명첩이 남발되기도 했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돈주고 양반족보 사는 경우가 점점 더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 5% 미만이었던 양반이 후기에는 30%가 넘었죠. 굳이 문중 어른들을 모두 만나지 않고도 족보 갱신 때 슬그머니 이름을 추가하는 게 담당자 몇에게 적당히 쥐어주면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Gesserit (125.♡.123.52)
작성일 2024.09.09 15:20
@하늘빛님에게 답글 공명첩, 족보 사는 것으로 양반이 될 수는 없었고 특히 족보 갱신 때 이름을 추가하는 것으로는 아무도 양반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신분 식별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거든요. 상대방 집안이 진짜 양반인지 관할 관청 및 문중을 통해, 지역 사회 평판을 통해, 그리고 보학이라는 선대부터 계속 이어진 족보를 통해 여러 가지 경로로 중복 체크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30%를 넘어 60~70%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가 조선시대 문서 기록(호구대장에 기록된 직업 명칭) 기계적으로 분류해 연구한 논문 주장이라서, 실제는 그렇지 않았고요.

가시나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가시나무 (118.♡.65.189)
작성일 2024.09.09 16:40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Gesserit (125.♡.123.52)
작성일 2024.09.09 16:50
@가시나무님에게 답글 전혀 없을 것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극히 예외적으로 몇 가지 사례가 있었을 수는 있었지만, 본문에 적힌 것과 같은 거대한 규모 또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댓글로 걸어주신 링크는 별다른 근거가 없는 그런 것들이고요.

팬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팬암 (203.♡.217.241)
작성일 2024.09.09 16:26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동부이촌동 요즘은 상암동

이자하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이자하 (211.♡.19.73)
작성일 2024.09.09 17:00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그렇게 따지면 어느 성씨 집성촌이 없어져야 했는데 남아있네요?

삼진에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삼진에바 (223.♡.75.234)
작성일 2024.09.09 17:04
@이자하님에게 답글 ??? 그래서 어쩌란거죠?

이자하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이자하 (211.♡.19.73)
작성일 2024.09.09 17:09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잔존이야 있겠지만 집단거주촌 유지가 쉽지 않을텐데.... "
라면서요
지방에 집성촌이 많이 있는데 6.25때문에 많이 없어졌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삼진에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삼진에바 (223.♡.75.234)
작성일 2024.09.09 17:12
@이자하님에게 답글 그니까 쉽지 않을텐데라고 했는데 어느 성씨 집성촌이 남아있는걸 왜 저한테 말하시는거죠?

이자하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이자하 (211.♡.19.73)
작성일 2024.09.09 17:15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저 글의 논리가 미묘하다면서요.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한거라고요.
대화가 안되네요. 그냥 사세요

삼진에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삼진에바 (223.♡.75.234)
작성일 2024.09.09 17:18
@이자하님에게 답글 대화가 뭔지 아시는 분 같진 않네요

이자하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이자하 (211.♡.19.73)
작성일 2024.09.09 17:21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ㅋㅋㅋㅋㅋㅋ 재밌으십니다.

삼진에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삼진에바 (116.♡.97.106)
작성일 2024.09.09 17:27
@이자하님에게 답글 ㅎㅎㅎ 별일이 다있네요

이자하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이자하 (211.♡.19.73)
작성일 2024.09.09 17:35
@삼진에바님에게 답글 화이팅 하세요

시레비펜님의 댓글

작성자 시레비펜 (118.♡.14.147)
작성일 2024.09.09 12:00
다카키 마사오
츠키야마 아키히로

유명하죠

SloaneHaeinKim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SloaneHaeinKim (118.♡.11.175)
작성일 2024.09.09 16:36
@시레비펜님에게 답글 고목정웅 박정희

월산명박 이명박

한숨부터 나오죠.

킬리만자로의수달님의 댓글

작성자 킬리만자로의수달 (58.♡.166.24)
작성일 2024.09.09 12:18
대한민국 재벌들 시초 고향이 특정 지역 한곳에 몰려있다는거

올제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올제 (14.♡.48.74)
작성일 2024.09.09 13:21
미군정이 일본인들의 귀환정책을 꽤나 강하게 실시했기 때문에, 잔류한 일본인은 극소수였던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나마도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과 같은 케이스가 많았구요.
저 글에서 이야기하는 집단거주촌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가사라님의 댓글

작성자 가사라 (112.♡.211.243)
작성일 2024.09.09 13:52
딱히 신뢰할만한 내용은 아니네요.
지방에 가면 적산가옥들 많습니다.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고 일본인의 정체성으로 사는 사람에 대한 얘기는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왜국의 정신으로 매국하는 그쪽 당은 있습니다만, 그들은 그냥 한국인에 매국노에요.

고결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고결 (123.♡.236.61)
작성일 2024.09.09 13:52
집단 거주는 몰라도 잔류 왜구는 엄청 났을 겁니다..

그 반대로 일본에 이런 저런 이유로 갔다가 돌아 오지 않은 재일 교포들이 많은 거랑 같이 보면 딱 맞습니다..

독일에 파독 광부나 간호사로 갔던 분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남은 것만 봐도 그렇죠..

미피키티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미피키티 (122.♡.20.162)
작성일 2024.09.09 14:16
전혀 가능성 없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발전을 어떻게 해서든 저해하려는
토왜 및 뉴또라이또들 보면 짐작이 갑니다.

링컨타는백수님의 댓글

작성자 링컨타는백수 (61.♡.88.154)
작성일 2024.09.09 14:41
이음동의어로는 토착왜구 정도가 있겠네요

꼰대생각님의 댓글

작성자 꼰대생각 (121.♡.97.251)
작성일 2024.09.09 14:46
가끔보면 부유한 집 중에 유독 일반인들과의 교류는 피하고 부유층,권력층 하고만 어울리며
자녀들 연애까지도 칼같이 관리하는 집안이 있었지요. 아이들은 될 수 있으면 해외로 많이 유학보내고..

국민학교 다닐때 보면 친구집 중에 이상한 집이 가끔 있었어요..
반기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친구따라 몰래 한번 가보면 뭔가 이국적인 느낌.
남녀호랑굔가 이상한 액자랑 향불같은거 피워져 있는 집도 있었고..

자녀들을 훈육하는 방식이 평범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네요. 부유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고문같은 느낌의 질낮은 체벌들..혁대로 때리기, 고무호스로 때리기,무릅꿇히고 허벅지 짖이기기 같은 거..(마치 조선인들 고문하듯이..엄마가 한국인이어서 진짜 자식이 아니라 생각했을까요..이제와 생각해보면 사무라이 영화같은데 나오는 뭔가 사이코패스같은 잔인한 느낌.)--어떻게 알았냐면 그놈들이 만만한 친구들을 괴롭히면서 지가 집에서 당한 걸 그대로 써먹어서...

안냥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안냥요 (219.♡.96.178)
작성일 2024.09.09 15:28
@꼰대생각님에게 답글 와 남묘호랜개쿄가 딱 떠올랐어요 저도

팬암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팬암 (203.♡.217.241)
작성일 2024.09.09 16:31
@꼰대생각님에게 답글

HEN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NE (220.♡.77.89)
작성일 2024.09.09 17:28
@꼰대생각님에게 답글 진짜 이야기(풍자하신 말씀이 아니라 정말 경험)이시면 정말 소름돋네요... ㄷㄷㄷ

빨간휴지파란휴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빨간휴지파란휴지 (183.♡.200.201)
작성일 2024.09.09 16:54

빨간휴지파란휴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빨간휴지파란휴지 (183.♡.200.201)
작성일 2024.09.09 16:54

빨간휴지파란휴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빨간휴지파란휴지 (183.♡.200.201)
작성일 2024.09.09 16:54

재익님의 댓글

작성자 재익 (221.♡.203.130)
작성일 2024.09.09 17:02
저희 어머니 동네엔 돈이 없어서 한국에 남아 허드렛일로 연명하다 60년대에서야 이웃들이 여비를 마련해줘서 돌아간 일본인은 있었다더군요.

BARCAS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BARCAS (39.♡.180.119)
작성일 2024.09.09 17:30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한덕에
우리나라의 고위층은 친일파로 채워졌었지요.
정부에 친일파가 가득한데 일본인들 집성촌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을듯 합니다.

다묘앙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다묘앙 (221.♡.196.74)
작성일 2024.09.09 17:31


1934년 조사내용같은데, 거주자 중 일본인의 비율이 엄청나게 높은 것을 보면 남은 일본인도 상당한 숫자일 것 같긴합니다.

TeunTeun님의 댓글

작성자 TeunTeun (203.♡.146.125)
작성일 2024.09.09 17:48
제 고향에는 큰 과수원에 일본 출신이 많고 (아마 갖고 갈 돈이 제한되어 대농장에 그냥 눌러 앉았겠지요)
국유지(이게 다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소유를 제 때 미리 세탁 못해서 국유지로 편입)를 싸게 대부해서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지도 넓었습니다.
일제 수탈의 현장 수운 내륙 항구도 있어서 적산가옥도 많구요.
초등 고학년 쯤 국사와 민족 교육이 많아지면 그런 집 애들이 좀 힘들어 하기는 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교류가 많아지고 곳곳에 벚꽃 도배하기 시작했다던 시절,
우리 초등(국민)학교에는 과거 일제시대 때 이 학교를 다녔었던 일본인들이 찾아와 고급진 학용품이라고 연필 등을 나눠주곤 했는데, 지금 와서 뇌피셜입니다만, 별달린 마크의 미쯔비씨(물론 같은 기업은 아니고 오해라 하긴 하던데) 이런 거 아니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최대 전범 기업과 이름이 같은 연필을 들이밀었을지, 또 누구를 보러 와서는 그때 소학교라고 들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소요마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소요마 (211.♡.154.94)
작성일 2024.09.09 17:49
잔류일본인 , 재한일본인들은 많이 있을 겁니다. 1965 협정이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오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시골에서 한국으로 친척소개로 시집오신분입니다. 그 친척 분은 한국에 살고 계셨습니다 (김씨 성을 쓰시는데,,, 꽤 땅많은 부자였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 내선일체를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진짜로 내선일체를 지금도 동아시아 발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을 만난적도 있습니다.  실제 젊은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70년대초),,, 저 마을은 양반동네, 저동네는 아랫동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고 마을끼리 교류가 없는 마을들이 꽤 있습니다. 전쟁중에 이사오신 분들이 모인 마을도 있고.  시골이라고 해서 옆동네와 교류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전쟁이 많은 것을 바꾼 것을 기억하세요.  잔류일본인들은 한국땅에서 어는정도 기반 잡고 살던 분들이 일본가서 살길 없는 시골출신들이 해방 후에도 남아서 사신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가서 성공한 한국인 이민자들 이야기를 많이 들으시잖아요.  재미교포의 자녀들이 전부 "성 김" 예전 주한 미대사처럼 미국에 충성하면 우리는 서운하게 생각하잖아요.  잔류일본인들이 일본을 그리워하고 일본을 위해서 조금 더 충성하는 것을 어느정도 이해는 합니다.  잔류일본인중에서 극소수의 제국충성파가 지금 한국의 학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심하고 있지만 어찌 하겠어요. 요금 중고등학교 한국사 학습시키는 것보시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려는 깊은 노력의 흔적들이 보입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중국의 역사교과서를 본적이 있는데 그네들은 역사공부 엄청시키기는 하더군요.  "테논헤이카 반자이" 외치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최고대학의 교수를 하고 대학총장을 지냈고 , 1945년 8월15일 이후에  독립운동 시작하던 사람을 독립투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흐릿한 역사교육을 하는 나라를 누가 이끌고 만들어 가고 있을까요.. 그렇게 만들기 위해 "사사카와" 는 그렇게 돈은 썼나봐요.  일본이 어떻게 잘 요리 했는지는 지금 SKY대학 국어국문과 교수들 중에서 일본에서 학위따온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국어국문학 전공하는데 일본으로 공부하러가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일본을 위해서 한국을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를 어떻게 처벌해야할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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