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뉴질랜드 동네 페북에 올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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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9.1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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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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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쫓는아이님의 댓글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게 아니라 마을이 키운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생각하는데..
지금은 마을이 쪼개져서 단독 세대로 살아가는 중이죠.
사족입니다만, 저출산을 해결하려면 공동체 의식을 가진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생각하는데..
지금은 마을이 쪼개져서 단독 세대로 살아가는 중이죠.
사족입니다만, 저출산을 해결하려면 공동체 의식을 가진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부서지는파도처럼님의 댓글
한국이 정(情)의 나라라고 하는데, 오늘날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요.😢
사람마다 다르고, 공동체마다 다르겠죠? 가슴 따뜻해지는 모습이에요.
사람마다 다르고, 공동체마다 다르겠죠? 가슴 따뜻해지는 모습이에요.
SD비니님의 댓글
같은 동네(미국 샌디에고시) 아줌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 키모 받는기간동안 동네 사람들이 먹을거 해서 그집에다가 나르더군요. 오늘은 어떤집에서 무슨 메뉴, 낼은 다른집에서 어떤 메뉴.. 등등. 물론 암투병하시는분은 잘 못드시겠지만, 그집 다른 식구들이 잘 드셨겠죠. 이런거 보면 서양사람들의 자기 동네 공동체 의식이 참 좋습니다.
달려라하니님의 댓글
가급적 선플을 달려고 노력합니다
싫어하는것에 굳이 부정적인 댓글을 달지 않고
좋아하는것에 응원하는 댓글을 달려고 합니다
정치쪽으로는 그게 안되네요ㅠ 화가 막...
싫어하는것에 굳이 부정적인 댓글을 달지 않고
좋아하는것에 응원하는 댓글을 달려고 합니다
정치쪽으로는 그게 안되네요ㅠ 화가 막...
마카로니님의 댓글
정말 부럽습니다.
안 그래도 지키기 힘든 공동체
를 파괴한 주범은 누구일까요?
"1야간의 주간화 2 휴일의 평일화 3 가정의 초토화 4라면의 상식화
멍에를 매는 곳, 어떤한 enjoy도 없다 모든 것을 바쳐 헌신"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3439.html
안 그래도 지키기 힘든 공동체
를 파괴한 주범은 누구일까요?
"1야간의 주간화 2 휴일의 평일화 3 가정의 초토화 4라면의 상식화
멍에를 매는 곳, 어떤한 enjoy도 없다 모든 것을 바쳐 헌신"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3439.html
BARCAS님의 댓글
우리도 저런때가 있었습니다.
음식이라도 하나하면 아랫집 윗집 다 나눠먹곤 했었었지요.
하지만 저런 공동체를 우리 스스로 없애버렸습니다.
솔직히 가족도 시월드니 뭐니 멀리하면서 생판 남들과 공동체를 이룬다는것 자체가..
음식이라도 하나하면 아랫집 윗집 다 나눠먹곤 했었었지요.
하지만 저런 공동체를 우리 스스로 없애버렸습니다.
솔직히 가족도 시월드니 뭐니 멀리하면서 생판 남들과 공동체를 이룬다는것 자체가..
훌릴레오님의 댓글
오 우리 옆동네군요 (전 마이랑이 베이) 뉴질랜드 25년 살면서 느끼지만 기본적으로 느긋하고 (어찌보면 게으르다 볼정도지만) 착한 국민성 이건 인정해줘야 되는 부분이라 느낍니다. 물가 많이 올라서 살기 빡셀때도 있고 또 호주 여행 한번 다녀오면 조금 촌(?)동네라 느껴질때도 있지만 이래서 뉴질랜드를 못 끊어요 ㅎ
오호라님의 댓글
우리도.. 가까이는 깍두기라는 문화도 있었고..
두레라는 조직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 이제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두레라는 조직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 이제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에스오렌우님의 댓글
어렸을때 4층에 살았지만 1층 아는 할머니댁에서 식사를 해결한 적이 많았습니다.
김치볶음이 예술이었거든요
디저트로 다른 집에 가서 강냉이 얻어먹구요.
그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댁들도 많아 어머니가 쌀을 공유하셨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다같이 모여서 계단 물청소하고 풍족한 집, 어려운 집 할것없이 친구 어머님들이 참 잘해주셨던 기억이 남네요.
이제는 너무나 멀어진 이야기입니다..ㅜ.ㅡ
김치볶음이 예술이었거든요
디저트로 다른 집에 가서 강냉이 얻어먹구요.
그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댁들도 많아 어머니가 쌀을 공유하셨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다같이 모여서 계단 물청소하고 풍족한 집, 어려운 집 할것없이 친구 어머님들이 참 잘해주셨던 기억이 남네요.
이제는 너무나 멀어진 이야기입니다..ㅜ.ㅡ
퍼스님의 댓글
저런게 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