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교과서에서도 잘못 가르쳤던 역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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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코미 89.♡.101.161
작성일 2024.09.11 10:39
2,010 조회
12 추천

본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6만, 14만 폭탄 드랍할 걸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1591년 막 통일한 국가가 내부 안정도 안 하고.

미래에서 이걸 다 보고 온 사람이 말했어도 야, 일본이 그렇게 머저리냐고 납득을 못할 일이거든요.

댓글 21 / 1 페이지

DdongleK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DdongleK (211.♡.195.243)
작성일 2024.09.11 10:43
이순신이 유래없는 고속 승진을 해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서 배만들고 대비할수 있었던건 어쨌거나 전쟁을 대비한거라 봐야겠죠.. 다만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의 침공을 해버린거고.. . 수군에 비해 육군의 준비가 너무 안일했다고 봐야죠..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코미 (89.♡.101.161)
작성일 2024.09.11 10:46
@DdongleK님에게 답글 그 육군도 이해할 만 한게 그 이전의 일본의 침략 사레인 삼포왜란 등을 보면 숫자도 적고 그마저도 조선의 활과 화포에 압도당했어요. 그러니 일본 육군의 평군을 그 정도로 보고 준비한 거죠.

DdongleK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dongleK (211.♡.195.243)
작성일 2024.09.11 10:50
@코미님에게 답글 왜구 정도라고 생각했을것 같습니다

바라군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바라군 (211.♡.181.219)
작성일 2024.09.11 10:53
@DdongleK님에게 답글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말고 경상좌수사,경상우수사(원균)이 왜군이 쳐들어오자 빤스런해서 더 피해가 컸습니다.
경상도 수군이 부산에서 대처만 잘했어도 왜군이 부산 영도에 손쉽게 입항 할 수 없었을거에요.
경상좌수사에 이순신장군만 있었어도 임진왜란이 아니라 그냥 해프닝정도이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이순신장군의 이름은 잊혀지긴 했겠네요.

어ㅉ지님의 댓글

작성자 어ㅉ지 (182.♡.218.18)
작성일 2024.09.11 10:43
어디서 나온 자료인가요? 대비가 안했다 로 알고 있기는 한데 자료를 알 수 있을 까요?

일리케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일리케 (175.♡.30.33)
작성일 2024.09.11 10:47
@어ㅉ지님에게 답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1592-1598) 이전에 전쟁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전쟁 대비를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조치들이 충분하지 않거나, 체계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이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대응에서 문제로 나타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조의 전쟁 대비

1. 군사 제도의 정비: 선조는 즉위 초부터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선조는 1590년(선조 23년)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새로운 군사 훈련 방식을 도입하고, 병사들에게 화기(총, 대포 등) 훈련을 시켰습니다. 훈련도감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 중요한 군사 기구로 자리 잡았지만, 그 기원은 전쟁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 국방 의식 고취: 선조는 일본의 군사 활동과 관련된 보고를 주기적으로 받았으며, 임진왜란 직전에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 내렸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통일을 이루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력을 확장하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3. 방어 거점 보강: 전쟁 전에 여러 성곽을 보수하고, 중요한 거점을 강화하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몇 년 전부터 동래, 울산 등지의 성곽이 보강되었으며, 군량미와 군사 물자를 확보하는데도 힘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가 전국적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4. 외교적 노력: 선조는 외교적으로도 일본과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통해 명나라와 교역을 원했을 때 이를 중재하려 했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외교 정책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저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대비의 한계

1. 국방 체계의 문제: 군사 제도의 정비와 훈련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사 체계는 여전히 약했습니다. 중앙 정부의 명령이 지방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지역 군대의 훈련과 장비 수준이 매우 낮았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전쟁 발발 초기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 못한 주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2. 국내 정치의 불안정: 선조 시기 조선은 내부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붕당 정치의 대립으로 인해 중요한 국방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거나,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3. 정보 수집과 경계 부족: 일본의 침략 의도에 대해 정보는 있었지만, 선조와 조정은 이를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의 군사력이 예상보다 강력하다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대응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론

선조가 전쟁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사실과 다릅니다. 선조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며, 성곽을 보수하는 등 전쟁 대비를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체계적이지 못했고, 군사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충분히 실행되지 못해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일본군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네요...

열린눈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열린눈 (211.♡.219.2)
작성일 2024.09.11 10:45
이순신장군도 조선 5백년에 유례가 없는 고속승진 시켰다고 하죠..

자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자비 (121.♡.181.136)
작성일 2024.09.11 10:58
@열린눈님에게 답글 고속 승진 하도록 추천인도 있습니다만, 그 추천인을 믿고 고속 승진 시킨 사람은 선조죠.
그것도 여지껏 관례였던 것 조차 무시하고 선조가 실행했다는 것,

아, 조선 최악의 임금은 인조라 생각하고 바로 다음이 선조로 생각하는데,
이순신 고속 승진에 관해서는 선조의 덕을 인정해야죠.

일리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일리케 (175.♡.30.33)
작성일 2024.09.11 10:45
14만 폭탄 드랍에 필요한 드랍쉽이 어떻게 있었을지 ..ㅎ ㄷ ㄷ ㄷ ㄷ
1대당 천명 승선도 못했을텐데....그만큼의 투사할 상륙선이 있었을까요. ㄷ ㄷ ㄷ

사막여우님의 댓글

작성자 사막여우 (223.♡.180.137)
작성일 2024.09.11 10:46
대비했는데
그게 하필 원균.

자고로 상륙전이 가장 어려운 것인데
원균이 자기 함대 수장시키고 토끼는 바람에
상륙전이 가장 쉬웠어요.

상륙이 너무 쉽게,
대규모 병력이 들어오다보니
방어체계를 갖추기도 전에
순식간에 한양까지 밀려버림.

츄하이하이볼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츄하이하이볼 (172.♡.252.20)
작성일 2024.09.11 11:01
@사막여우님에게 답글

근두운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근두운 (220.♡.122.218)
작성일 2024.09.11 10:47
선조가 어떤 대비를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자료가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2024.09.11 10:55
@근두운님에게 답글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9_0020_0010_0030
한편으로 조선조정에서는 임란 1년 전부터 만일에 대비한 방어책을 세웠다. 첫째는 각 도의 성곽을 수축하고, 둘째 무기를 점검하고, 셋째 무신 중에 뛰어난 재질이 있는 자는 서열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일이었다. 특히 조정에서는 일본이 육전보다는 수전에 능하다는 판단 아래 전국, 그 중에서도 경상·전라도의 성곽 수축에 힘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 및 좌·우병영의 성을 증축하고 垓字를 깊이 파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양반들은 왜군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하였고, 성곽수축과 군사훈련에 동원된 백성들은 지방통치관인 수령과 군사지휘관인 병사 등에게 원망을 품게 되었다.008) 임란이 일어나기 1개월 전인 3월에 전라도 강진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巡察使 申砬의 독촉으로 성곽을 수축하는 승군과 군사훈련에 동원된 곡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했는데 이는 경상도도 거의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이는 “우리 마을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어 아무리 장사라 하여도 뛰어넘을 수 없는데 하물며 동래·부산 앞은 망망대해인데 왜인이 어떻게 넓은 바다를 넘어올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을텐데 성곽을 수축하여 민폐만 크게 일으킨다고 반대하였다.009) 따라서 城堡의 수축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2백 년간 평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전쟁대비란 백성의 원한만 샀지 일본 대군을 격퇴할 방비가 되지 못했다. 다만 서열에 관계없이 무장을 뽑아 李舜臣·權慄 등과 같은 인물이 발탁되었다.

근두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근두운 (220.♡.122.218)
작성일 2024.09.11 11:47
@heltant79님에게 답글 감사합니다.  마냥 안일한건 아니었네요.

사막여우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사막여우 (223.♡.180.137)
작성일 2024.09.11 10:56
@근두운님에게 답글 챗gpt에게 물어보니

임진왜란을 대비하기 위해 선조는 몇 가지 군사적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먼저, 조선 정부는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의 방어 준비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또한, 선조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외교적으로도 대마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정보는 부분적이거나 가공된 것이 많아 조선이 이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선조의 군사적 대비는 일본의 침략을 충분히 막아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는 군사적 준비의 부족과 정보의 부정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랬다고 하네요.

근두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근두운 (220.♡.122.218)
작성일 2024.09.11 11:47
@사막여우님에게 답글 답변 감사드립니다.

heltant79님의 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2024.09.11 10:53
1. 일본의 침공에 대한 조선의 레퍼런스라는 게 왕조 역사에서 최대 침략이었던 을묘왜변/삼포왜란이라, 거기에 맞게 해안 방위나 군 편제가 돼있었던 점
2. 설사 일본의 침공 규모를 알고 있었다 해도, 농본주의 정책으로 만성적인 재정부족에 시달리던 조선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는 점

이 두 개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조선이 털린 이유를 탐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침략을 격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민족의 불굴의 저항의지와 이순신 장군의 분전 같은 것도 좋지만, 조선이 일본에 비해 굉장히 우월한 관료제에서 나오는 행정력과 중앙집중화라는 점을 언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문의 관점은 당파성론을 부각시키는 식민사학 교육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태루님의 댓글

작성자 태루 (121.♡.124.164)
작성일 2024.09.11 10:55
제가 보기엔 일제시대에 역사를 왜곡시킨게 많을겁니다.

고려장이라든가... 이런것도 다 일본놈들이 왜곡시킨거라

파키케팔로님의 댓글

작성자 파키케팔로 (106.♡.195.141)
작성일 2024.09.11 10:56
육군 정예는 북방을 지켜야 했던터라 쉽게 밑으로 뺄 수 없었죠..

자비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자비 (121.♡.181.136)
작성일 2024.09.11 11:05
@파키케팔로님에게 답글 이순신도 젊은 군관 시절에 북방에서 여진족 막았죠.

FV4030님의 댓글

작성자 FV4030 (210.♡.27.130)
작성일 2024.09.11 11:13
당시 조정의 일각(대표젹으로 김성일)에서도, 지방 인사(대표적으로 곽재우 장군의 장인)들도 굳이 방위태세 강화할 필요 있냐 왜 지역민들을 성곽 수축하는데 동원하느냐 하며 반발이 많았죠. 없는 살림에 막으려고 노력한 건 맞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쾌속 진급을 하기도 하죠.

그러나 확실히 조선이 국가 세수를 왜나라처럼 쥐어짜는 타입도 아니고, 군 병력 동원 시스템도 바뀌는 중이고.. 뭐 이런 게 겹쳐서 피해를 많이 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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