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제3세계 민주주의의 선봉이라는 착각, 신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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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lache 218.♡.103.95
작성일 2024.09.1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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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은 서방-미국과 유럽-이 전세계 자유민주주의의 첨병으로 어떤 희생과 댓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죠. 아래 내용 중에 이미 많은 부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이런 내용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제이슨 히켈 <격차> 중에서 발췌-


 서구 열강의 정부와 기업들은 이런 일(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 발전주의적 혁명과 민족주의 정치권력이 확대되는 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전에 누리던 시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 이들은 모종의 반혁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케인스주의가 풀아낸 개념들에 대해 대중의 저항이 일지도 않았고, 글로벌 남부에서 경제적 독립의 열망이 높아지는 것을 억압할 길도 없었다. 


 1953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발전주의에 맞서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발전주의가 미국이 다국적 기업들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위협한다고 보았고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두 사람을 행정부에 고용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그의 동생인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이었다. 덜레스 형제는 '설리번 앤 프롬웰'이라는 로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글로벌 남부의 발전주의 때문에 잃고 있는 것이 많다고 느끼고 있는 JP모건, 쿠바 사탕수수 코퍼레이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거대 기업들이 이 로펌의 고객사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평등, 정의, 독립의 원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운동을 공격한다면 정당화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국 대중의 눈에 합당해 보일 만한 방법을 찾아야 했고, 냉전 레토릭에 강하게 의존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발전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첫 단계라는 프레임을 씌우면서 발전주의 국가들을 소련과 연결지었고, 미국인들의 인식에서 발전주의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우어의 백래시의 첫 대상은 이란이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의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발전주의의 견고한 버팀목이었다. 큰 키에 위엄 있는 풍체를 지녔으며 파리에서 교육받은 모사데크는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이란에서 인기가 많았다. 총리 시절에 실업 보상과 아프거나 다친 노동자에 대한 복지 급여를 도입했고 농촌의 강제 노동을 철폐했으며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 농촌 개발 프로젝트의 재원을 마련했다. 또한 가장 유명하게, 영국의 '앵글로 이란 오일 컴퍼니'(현재의 BP)가 소유하고 있던 이란의 유정에 대한 소유권 재협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앵글로 이란 오일 컴퍼니가 회계 감사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이란 의회는 투표를 통해 만장일치로 이 회사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이 일로 이란에서 모사데크의 인기는 한층 더 높아졌지만 영국 정부는 분노했고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군사 개입이라는 선택지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하지만 소련이 이란 쪽에서 개입해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할지 모른다는 점이 우려되었고, 결국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이라고 불리는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 작전은 CIA가 이끌었고 커밋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로, 할아버지 루즈벨트는 먼로 독트린을 확대한 '루즈벨트 계론'으로 미국의 해외 개입주의에 길을 닦은 바 있다)가 담당했다. 계획은 치밀했다. 우선 [이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들 사이에 반정부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모사데크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가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키 위해 바람잡이를 매수해 거리 시위를 하게 했다. 이어서 이란 군대를 지원해서 모사데크를 내말고 왕가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권력을 잡게 했다. 계획은 성공했다. 1953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나 모사데크가 밀려났고 샤(왕조)가 군부 정권이자 절대 왕정으로서 권력을 잡았다. 이후 팔라비는 26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그는통치 시기 대부분에 걸쳐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이란의 정책은 이 지역에서 서구의 또 다른 주요 위성국인 사우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석유 기업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립되었다. 모사데크는 이후 평생을 가택 연금 상태로 지냈다.


 아작스 작전은 미국이 외국 정부를 전복한 초창기 작전 중 하나였고, 분명 마지막 작전은 아니었다. 곧이어 1954년에 덜레스 형제는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에 나섰다.


 1931년부터 과테말라를 통치하고 있던 군부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는 미국이 소유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 비옥한 토지를 방대하게 넘기는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 땅의 대부분은 마야 원주민 농민들에게서 탈취한 땅이었다. 우비코의 잔혹한 통치를 오랫동안 견디다 못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켜 그를 몰아냈고, 처음으로 과테말라에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선서로 1945년에 집권한 철학 교수 출신 후안 호세 아레발로는 전임자와 정반대였다. 우비코가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과테말라를 통치한 반면 아레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책의 더 높은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는 최저 임금법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도입했다. 우비코 정권하에서 자행되었던 토지 강탈로 대대적인 궁핍화가 벌어진 것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임기 6년 동안 과테말라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유와 안정을 구가했고, 임기가 끝난 그는 선고로 다음 주자에게 정권을 넘기기 위해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행정부 장관이었던 하코보 아르벤스가 당선되었다.


 스위스계 인물로 '빅 블론드Big Blond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아르벤스는 아레발로의 진보적인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농협개혁법'으로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당시에 과테말라에서는 3%도 안 되는 사람들이 토지의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벤스의 토지 개혁은 사용되지 않고 있던 많은 민간 토지를 국유화해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계획이었다. 토지가 없는 농민들 대부분은 우비코 시절에 생긴 빚 때문에 노예화된 피해자들이었고, 농업개혁법은 이들이 농사를 지어 안정적으로 기아를 면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45만 에이커의 땅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였다. 몰수 토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회사는 협조를 거부했다. 협조는커녕 미국 정부에 아르벤스를 축출해달라고 로비를 하고 냉전 레토릭을 이용해 아르벤스 축출에 대한 미국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아르벤스를 러시아의 꼭두각시로, 과테말라를 소련의 위성 국가로 보이게 한 것이다.[형과 함께 회사를 대리하는 변호사로 일하며] 유나이티드 프루트에서 38년간 보수를 받았던 앨런 덜레스의 지휘하에 CIA가 기꺼이 이 일에 나섰다. 코드면 'PBSUCCESS'라 불린 이 작전에서, 이들은 과테말라의 수도를 폭격하고 아르벤스를 몰아낸 뒤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군부 독재자로 세웠다. 과테말라에서 10년간의 희망적이던 민주주의 시기는 이렇게 끝났다. 새 정부는 빠르게 외국인 투자 규제를 완화했고 아르벤스 시절의 정책을 되돌렸으며, 그에 비판하는 사람들 수천 명을 감옥에 보냈다. 과테말라는 1996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련의 군부 독재자들이 통치했다. 이 시기 내내 정권은 마야 원주민에게서 토지를 빼앗았고, 과테말라는 서반구에서 가장 빈곤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가혹하게 진압했다. 20만 명가랴의 마야인이 토지 강탈에 저항하다 살해되었다.


 과테말라 침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절의 라틴아메리가 불개입주의였던 '선린 외교 정책'이 겨우 20년간의 평화 이후에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했다. 과테말라 침공으로 아이젠하워는 먼로 독트린을 사실상 부활시켰고,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권력을 투사하던 오랜 버릇도 되살렸다.


 브라질에서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1961년에 대통령이 된 전직 축구 선수이자 국민 영웅이었던 주앙 굴라르는 그의 대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기본 개혁'을 시작했다. 문맹자에게도 투표권을 확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인 교육을 제공했으며 다국적 기업이 국외로 가지고 나가려고 하는 모든 수익에 과세했고 생산적으로 쓰이지 않는 토지를 600헥타르 이상 소유하고 있는 경우 회수해 재부배했다. 이러한 개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득이 되었지만 브라질 지배층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62년에 브라질 정부는 사업이 난항을 겪던 미국 전화 서비스업체 ITT 코퍼레이션을 국유화했다. 그런데 이 회사의 CEO 헤럴드 제닌은 CIA의 국장과 친한 사이였다. 제닌은 브라질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는데, ITT의 브라질 지사가 걱정이어서라기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굴라르의 정책을 따라 할 경우 ITT의 이익이 크게 훼손될지 모른다고 우려해서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개입에 반대했지만,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얼마 뒤 CIA는 영국의 협조를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64년에 '브라더 샘Brother Sam' 작전에서 미국은 굴라르를 축출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고, 이렇게 해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21년 동안 브라질을 통치했다. 새 정권은 노골적으로 서구 기업 친화적이었고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시장 자유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굴라르가 빈곤 타파 전선에서 달성했던 성과가 예전으로 되돌아갔고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이윤 수준도 옛날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독재자는 민주적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객적으로 고문하고 암살했다.


 서구가 은밀하게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한 사례는 한참 더 이야기할 수도 있다. 1953년에 영국은 가이아나에서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을 축출했다. 1961년에는 미국이 쿠바의 혁명 정부 전복을 시도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인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1965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군부 독재에 맞서 민중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을 명령했다. 엘살바도르에서도 미국은 폭압적인 군사 정부에 1980년대까지도 무기 등 여러 지원을 계속했도, 민중 혁명을 억누르기 위한 '죽음의 부대' 활동과 민간인에 대한 고문 및 대규모 강제 이주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니카라과에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니엘 오르테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친미 우익 민병대('콘트라'라고 불린다)에 1980년대 내내 불법적인 재정 지원과 군사 지원을 했다. 오르테가가 발전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이티, 파라과이,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파나마에서도 우익 독재자를 이런저런 시기에 각각 지원했다. 이러한 작전의 기술적, 전술적 지원은 상당 부분 '아메리카 스쿨School of the Americas'에서 이루어졌는데, 조지아주와 미군 기지에 위치한 이곳은 오랫동안 암살자와 독재자를 훈련시키는 역할을 했고 여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안보 협력을 위한 서반구 연구소WHINSEC'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괴 있다.


 미국이 발전주의를 짓밟으려고 한 곳은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니었다. 브라질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에 이와 비슷한, 아니 더 파괴적인 일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네덜란드 식민 통치기에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수카르노가 독립 후에 대통령이 되어 표준적인 발전주의 정책등을 펼쳤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값싼 외국 수입품으로부터 보호했고 가난한 사라들에게 부를 재분배했으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몰아냈다. 서구 열강은 수카르노의 정책에도, 그리고 그가 비동맹 운동 조직화에 앞장서는 데도 분노했다. 그런던 중 수카르노가 석유, 고무 등에서 미국과 유럽인이 통제하던 자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은 이를 개입의 빌미로 삼았다.


 군부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수카르노의 정책에 분노해 있던 수하르토 장군은 CIA가 쿠데타를 지원할 의사를 분명히 하자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 1965년에 수하르토 장군은 미국에서 정보와 무기를 지원받아 50만~100만 명에 육박하는 수카르노 대통령 지지자를 살해했다.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이라 할 만했다. 1967년이면 수카르노 대통령의 기반은 사라졌거나 위협에 눌려 항복했고 수하르토 장군이 국가를 장악했다. 그의 군부 통치는 1998년까지 계속되었고 서구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활짝 문을 열었다. 《타임》이 196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정치적 변화를 두고 "서구 입장에서는 지난 몇 년 사이 아시아에서 들려온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유명하다. 수하르토 정권은 포드 재단의 지원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유학한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들에게 경제 정책 수립을 맡겼다. '버클리 마피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수하르토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시장을 자유화하고 발전주의의 잔재를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제거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가나가 서구 열강의 요주의 국가였다. 1957년에 가나는 아프리카 최초릐 독립국 중 하나가 되었고 해방 운동 지도자 파메 은크루마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프리카의 선도적인 발전주의 사상가이던 은크루마는 가나의 제조업 발달을 촉진했고 유럽산 수입품 의존도를 상당히 줄였다. 또한 광산을 국유화했고 외국 기업을 규제했으며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실시했고 농촌 인프라 건설에 사람들을 고용했다. 은크루마는 여타 아프리카 지역의 해방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아프리카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범아프리카 비전을 구상했다. 또한 식민주의 시기에 식민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강요하고 조장한 모든 인위적은 분열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비전은 아프리카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처럼 은크루마도 비동맹운동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글로벌 남부 각지에서 서구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데타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서구가 글로벌 남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맹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가 1965년에 펴낸 《신식민주의: 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Neo-Colonialism: The last stage of Imperialism》는 이러한 비판을 유려하고 힘 있게 담고 있는 명저로, 글로벌 남부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좌절에 강력한 목소리를 실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은크루마를 즉각적인 공격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 이르게는 1961년부터 영국과 미국은 그의 제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에 실행되었다. 은크루마가 국빈 방문으로 해외에 갔을 때 CIA가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부 독재 정권을 세웠다. 독재자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불러와 경제를 관리하게 했고 국가 자산을 민영화했으며 외국 기업에 대한 장벽을 없앴고 가나를 예전처럼 천연자원 수출국 역할로만 한정시켰다. 은크루마는 남은 생을 기니의 코나크리에서 망명자로 살았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국가들도 발전주의 실험을 했고, 사하라 이북 국가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서구의 개입이 너무나 빨라서 전혀 기회를 갖지 못한 곳도 많았다. 콩고에서 1960년에 독립 후 첫 지도자로 선출된 젊은 범아프리카주의자 파트리스 루뭄바는 2개월밖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벨기에와 미국이 기획한 폭력적인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미국은 루뭄바가 콩고의 광대한 광물 자원, 특히 핵 프로그램에 필요한 우라늄과 제트 엔진에 필요한 코발트 등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훼손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루뭄바는 살행당했고 시신은 토막 나 통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자리에 서구 정부들은 장교 출신의 모부투 세세 세코를 앉혔다. 세코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미국, 프랑스, 벨기에의 지원을 받아 거의 40년이나 콩고를 통치했다. 그는 서구의 지원 대부분을 해외에 있는 자신의 금고로 빼돌렸다. 모부투의 긴 통치 시기 동안 콩고(자이르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1인당 소득은 연 2.2%씩 감소했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붕괴여서, 콩고의 빈곤은 벨기에의 식민지이던 시절보다도 심해졌다.


...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아프리카 정치에 대해 흔히들 떠올리는 통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서구인의 상상에서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부패한 독재자에 의해 고통받는 대륙이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구 스타일의 민주주의 가치를 알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식민주의 시기가 끝난 이래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일구기 위해 내내 노력했지만 서구에 의해 적극적으로 가로막혔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실이다. 아프리카에서 독재가 지속된 것은 대체로 서구의 개입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서구 열강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도를 수없이 좌절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가 민주주의와 대중 주권의 횃불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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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위에서 발췌한 내용들은 주로 기한이 지난 해제된 비밀문서의 내용들 혹은 작전 중 발각되서 실패한 내용이기 때문에 공개된 것들이고 대부분 지금으로부터 50년 이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죠.


 위 내용에서 서구-미국과 유럽-가 추구했던 외교적 가치-자국의 이익 우선-이 바뀌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와 같은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윤석열 정권하에서 우리 국민들은 이미 미국,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대한민국의 권리를 얼마나 유린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죠. 아는 만큼 보이고, 모르면 당하고, 강한자만 살아남는다의 원칙이 외교에서만큼 철저히 지켜지는 영역이 없을 겁니다.


댓글 4 / 1 페이지

달짝지근님의 댓글

작성자 달짝지근 (125.♡.218.23)
작성일 09.14 13:06
미영프가 제 3세계가 독재에 저항해서 민주주의가 태동할 때 선거 개입을 하거나 쿠데타를 지원하거나 한 사건은 쌔고 쌨죠
그냥 지 입맛에 맞는 지도자를 원할 뿐이고 민주주의는 남의 나라 쳐들어가거나 제재할 때의 명분일 뿐

우주난민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우주난민 (89.♡.101.158)
작성일 09.14 13:14
미국이 손댔는데 정상적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죠. 그나마 그것도 미국이 묵인한 군사독재로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지만, 피흘리며 싸우고 열심히 일해 민주주의와 선진국 쟁취해 낸 우리 국민들이 대단한거고요...

Dendrobium님의 댓글

작성자 Dendrobium (175.♡.192.189)
작성일 09.14 13:19
저렇게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 뻔뻔하죠.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따서 항공모함을 만들고, 덜레스의 이름은 미국 수도 공항에다가 붙여놓았으니 말입니다.

DavidKim님의 댓글

작성자 DavidKim (142.♡.57.228)
작성일 09.14 20:38
미국이 잘 나가기전에는 영국, 스페인 등 유럽국가들이 전세계에 식민지를 만들며 해당국을 수탈했다면, 현재는 미국이 달러패권을 가지고 프린팅한 돈으로 해외에 투자해서 배당금과 투자수익을 챙기고, 또한 프린팅한 돈으로 다른 나라들이 뼈빠지게 고생해 만든 상품을 수입하는 말도 안되는 수탈이 진행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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