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관련으로 꼴통인 줄 알았는데 아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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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코미 211.♡.64.83
작성일 2024.10.2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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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대중들의 인식으로는 그저 끝까지 명과의 의리를 지키자는 수구파 관료로 실리를 중시하는 최명길과는 반대되는 인물로 찍혀 있습니다.

이렇게 된 건 그가 서인 출신인데다가 후배(?)인 송시열 등이 북벌론을 내세우면서 그를 순교자처럼 내세웠고, 이를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대주의 수구꼴통으로 비난해서 생긴 일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상헌은 단순히 명나라 못잃어 조선 망해도 못 잃어 하는 맹목적인 사대주의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김상헌은 평생 관료로서 명과 후금, 심지어 대마도까지 숱하게 들락날락거리며 외교 업무를 맡아 당시 국제 정세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다가 성리학적 명분론보다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 것이 명과 후금의 기록에 드러나고 있죠.

그래서 정묘호란 당시 명나라가 만력제의 실정과 환관들의 득세로 몰락하는 것, 그리고 후금이 마치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중국의 천자를 자칭할 것임을 알고서는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는다 했을 때 별 수 없지 하며 인정하였습니다.

그럼 왜 주전론에 섰는가? 그 이유도 지극히 현실적인데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첫번째로 당시 중국 정세를 보면 청나라는 산해관 등 명나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만주 쪽을 점유한 상황이었습니다. 명나라는 비록 늙고 약해졌다고는 하나 당시 상황에서 보면 아무리 못 해도 금나라에 밀린 남송처럼 중국 일부를 잃을지언정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 있었죠. 도리어 청나라는 명나라의 경제제제로 자칫하면 망할 가능성도 컸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항복하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게 되면 큰 위험에 처할 수 잇다고 본 거죠. 만약 명나라가 끝까지 버텨서 중국 영토 상당수를 지키거나, 도리어 청나라가 망한다면 조선은 배신자로 찍혀 동아시아에서 고립되거나 명나라의 침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청과 맞서 싸우되 적당히 청나라에게 매운 맛을 보여준 후 협상을 하는 고구려와 고려 스타일의 외교 정책을 펴려고 한 겁니다. 


두번째는 청에 굴복하면 그 다음에 청은 조선을 지배하려 들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청나라를 몽골 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는 정복자들로 보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동안 고려와 조선은 강력한 군사력과 방어선을 갖추고 중화적 천명질서 안에 편입되어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으로 군사력과 방어선은 무너졌기 때문에 무작정 항복한다면 청은 그 다음에 조선의 국권을 넘기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죠. 실제로 몽골과 중국에서 그렇게 함으로서 그의 예측이 맞아 떨어졌고요. 

그리고 설령 섣불리 항복하자고 한들 청나라는 받아들일 가능성도 낮았습니다. 당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부터가 조선에 대해 강경파였고 일부러 무력을 이용해 조선을 짓밟아서 굴복시켜 자신의 권위와 청나라의 국력을 자랑할 속샘이었음이 최근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청나라는 무슨 외교를 해도 조선을 공격하려 했기에, 필연적인 전쟁이라고 결론 내리는 학자가 많아졌어요.


즉 김상헌의 주전론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수구꼴통적인 판단이 아닌, 오히려 그간 중국의 여러 역사와 당시 국제정세를 보고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명나라가 그렇게 어이없이 이자성에 의해 무너지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스스로 문을 열어서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을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은 모두 빗나가 버린 것이죠.

뭐, 결과적으로 실패한 건 맞고, 그걸 또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이 북벌론 등을 내세우면서 단지 그를 성리학적 도덕을 지킨 열사로 포장해 버린 것이 빠를 까를 만든다는 말처럼 독으로 돌아와 지금은 뭐... 

명의 사대를 위해 나라를 망친 꼰대가 아닌데 꼰대로 낙인찍힌 겁니다.


출처 : ​청음 김상헌의 현실 인식과 척화론

댓글 8 / 1 페이지

여름날의배짱이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여름날의배짱이 (250.♡.126.52)
작성일 15:10
명이 잘 막고 반격에 성공했다면?
인조도 재 평가 되었을까요?
조선 왕조 원탑 등신인데...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코미 (2a09:bac3.♡.14.2::20b:5b)
작성일 15:17
@여름날의배짱이님에게 답글 인조도 의외로 요즘 평가는 초기엔 천방지축 초보자, 후기에는 강비 사건 빼면 전후복구와 조선 후기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왕노릇은 제대로 했다 정도로 결론지어 지는 중이죠. 다만 초기 과오가 너무 커서 후기에 분발해서 상쇄될 정도는 아닙니다.

다시머리에꽃을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다시머리에꽃을 (249.♡.103.73)
작성일 15:48
당시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군상태도 좋지 않았어서..
남한산성에서 좀 더 분전할 수 있었다면 청나라가 gg치고 퇴각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코미 (180.♡.243.17)
작성일 18:32
@다시머리에꽃을님에게 답글 만주족이 당시에 경제사정도 나빠서 오래 끌면 끌수록 식량이나 자금 등이 부족해질 것이었고, 더구나 조선에 풍토병으로 퍼진 천연두는 만주족에게 면역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퍼진 천연두로 만주족들이 피를 봤죠.

사막여우님의 댓글

작성자 사막여우 (253.♡.158.44)
작성일 16:36
뭔가 논리가 안맞는 얘기네요.

"청나라에게 매운 맛을 보여준 후 협상을 하는 고구려와 고려 스타일의 외교 정책을 펴려고 한 겁니다. "

외교에 밝은 정치가였다면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게 매운 맛을 보여줄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았어야죠.
(청의 군사력은 이미 광해군 시절에 확인이 되었죠)

"청에 굴복하면 그 다음에 청은 조선을 지배하려 들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외교에 밝았다면
청의 조선침략이 배후의 안정에 있다는 걸
알았을테고
정복후 지배가 목적이라면
청은 침략전부터 군신관계를 요구했겠죠.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코미 (180.♡.243.17)
작성일 18:29
@사막여우님에게 답글 1. 공격측에 있었던 사르후 전투와 달리 방어하는 측이라면 군대가 산성과 읍성에 들어가 농성하며 버티면 되기에 당시 조선의 군사력으로 충분했습니다. 단지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뒤에서 공격당할 걸 각오하고 성이나 길을 장악하지 않고 바로 한성으로 진격해 버리는 상식을 벗어난 짓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군대가 제대로 모여 막기도 전에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겁니다. 지금이야 청나라의 그 전술은 탁월해 보이지만, 당시엔 이러다가 포위당한다는 비판이 청나라 내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당한 사례가 바로 살수 대첩과 귀주 대첩이거든요.

2. 홍타이지의 목적은 철저한 조선의 멸망 내지는 속국화였습니다. 그래서 설령 조선이 청나라의 모든 조건을 다 받아들였다 해도 온갖 트집을 잡거나 더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을 거라고 현재 한국과 중국 사학계 측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저렇게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청나라는 자신의 국력으로는 조선의 많은 인구와 천연두 등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어렵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고, 그래서 인조의 항복만 받고 물러선 겁니다.

사막여우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사막여우 (253.♡.158.44)
작성일 18:41
@코미님에게 답글 1. 몽골이 고려를 공격할때
임란때 일본이 조선을 공격할때
효과적인 모범적인 전략이 있는데
산성방어로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많이 모자란거죠.

2. 일단 뚫기만하면 먹기좋은 대륙을 놔두고
장기전에 불리한 한반도로 정복을 목적으로
내려오기 어렵죠.
한반도에 발이 묶이면 대륙으로 들어갈
기회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데..

이미 여진족은 금나라의 선조들이
어떻게 대륙을 지배했는지 잘 알아요.

보따람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보따람 (116.♡.206.143)
작성일 19:35
@코미님에게 답글 거란은 한반도에 대한 지리적 정보가 몰라서 당한 것이고요. 또한 여요전쟁은 역사서에 나왔기에 산성방어 전략은 잘못된 전략이지요.

이괄의 난으로 군제가 바뀌어서 군사력이 약회되었고, 남한산성도 좋은 산성인데 병자호란전에 식량을 산성위로 운반해야 하지만 담당자가 죽고 상소로 인해 식량을 성아래에 방치했지요.

좀 더 버틸 시간이 줄어들었지요.

외곽에서 지원을 해야 하는데 하나는 멀리서 지켜보고 또하나는 용인에서 처참하게  꺽였지요.

인조는 어리버리 왕은 맞고, 지지 세력 또한 초자였지요.

광해군보다 인조가 나았을 것입니다. 광해군이었으면 명과 같은 처지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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