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초(량치차오)가 말하는 가짜 역사책 구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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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말기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했고, 저명한 학자이자 언론인이던 량치차오는 저서 <중국역사연구법> 제5장 '사료의 수집과 감별' 에서 위서, 즉 가짜 역사책을 구분하는 방법을 저술했습니다.
이 내용은 지금 전세계 역사학계에서도 잘 사용하는 구분법이자 가장 기초적인 사료비판 방법으로 그 내용을 여기에 퍼 와 봅니다.
1. 그 책이 과거에는 다른 저서들에서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인용한 적이 전혀 없는데 갑자기 나타났다면 십중팔구 가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는 신라시대의 '삼성기'(안함로, 원동중), 고려시대의 '단군세기'(이암), 고려시대의 '북부여기'(범장), 조선시대의 '태백일사'(이맥)를 근대에 묶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삼성기'는 조선 세조 시기 이름이 언급됩니다만 다른 책들은 언급된 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삼성기'마저 미심쩍은데 그건 2번에 적습니다.
2. 그 책이 과거의 저서에 보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그 이름으로 된 책이 나타났는데, 편제나 내용 등이 과거의 저서에 나타난 것과 완전히 다르다면 십중팔구 가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의 저자 이유립과 그 추종자들은 이 책이 1911년에 계연수라는 인물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소위 환국이라고 하는 단군 이전의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역사를 모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삼성기'만 해도 환단고기는 저자를 안함로와 원동중이 지었다고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성기를 안함, 노원, 동중 세 승려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즉 저자 이름부터 다릅니다.
3. 그 책이 과거에 언급된 적이 있든 없든 간에, 새로 발견된 책이 어떻게 전해져 내려왔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면 바로 경솔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의 경우 계연수란 사람이 1911년에 적은 것을 이유립이 1979년에 공개했다고 하는데 이유립이 그 책을 입수한 경위도 불분명하고, 공개할 거라면 해방 후에 바로 해도 되는데 왜 1979년까지 묵혔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4. 그 책이 전해져 온 내력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새로 발견된 책이 "아무개가 예전에 쓴 것" 이라면 진서인지 불확실하다.
애초에 환단고기는 그 전해진 내력이 파악조차 안 되니 예시를 삼을 수 없군요.
5. 과거의 인물이 진서의 원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 것이 있는데, 새로 발견된 책의 내용이 그 인용과 다르다면 가짜가 분명하다.
애초에 환단고기는 1960~70년대에 이유립이 열심히 창작을 하신 소설인지라 과거에 인용된 것이 없습니다.
6. 책의 저자가 아무개라고 나오는데,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이 그 아무개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책의 내용은 전부. 적어도 일부분 가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에는 '문화', '세계만방'과 같은 근대 용어와 '해성', '영고탑'과 같은 근대 지명이 나타납니다. 단군조선 시대에 어찌 빨라도 17세기 이후 나타난 단어와 만주족이 이주해 생긴 지명 예측해서 적습니까? 그 외에도 환국 시절에 있지도 않은 선비, 몽골 같은 민족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거기까지 가면 너무 지치니 패스...
7. 그 책이 진서라고 하더라도, 뒷 시대의 사람이 책의 일부분을 고치거나 바꾼 것이 분명하다면 책 전체를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에는 제가 6번에서 언급한 근대 단어와 지명 등이 나오는 것을 보고 환빠들은 이는 후세의 가필이며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후세의 일부 가필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가 가필이고 어디까지가 가필이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와 기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외의 부분은 가필이 아닌 줄 어떻게 믿습니까?
8. 책 속에 언급된 것이 사실과 확연히 다르다면, 가짜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일부 환빠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륙에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시기에 있던 후한~당나라까지의 중국 왕조들은 무엇이 되나요? 당장 그 중국 왕조의 존재를 유물 유적들이 중국 공산당과 홍위병이 신나게 부순 상태에서도 확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설마 지하 수십미터에 있는 유물이나 유적까지 다 조작했다고 할 건가요.
9. 두 책이 같은 사건을 기록했는데 서로 모순이 일어난다면,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가 가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 내에서 환국과 고조선의 국가체제를 다루는 걸 보면 봉건제적 특성과 군현제적 특성이 모두 나타나는 모순을 보입니다. 환국은 여러 군벌이나 국가를 정복해 새운 것도 아닌데다가 단군의 힘이 절대군주 수준인데 왜 직접 군현제로 통치하지 않고 봉건제 같은 방법을 쓸까요? 더구나 이렇게 딱 봐도 충돌이 일어나는 두 제도적 특징이 나타나는데 신라의 상수리 제도나 고려의 기인 제도같이 지방 세력을 옭아매는 견제책도 없이 수백년 넘게 잘 작동한다는 건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급 헛소리인 겁니다.
10. 각 시대의 문체는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것이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스스로 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뒷 시대의 사람이 만들어낸 책은 내용을 엄밀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문체를 한번 보기만 하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는 수백년 전 삼국시대~조선시대 책들을 엮었다면서 근대 한자들이나 용법이 발견됩니다. 아니, 그냥 근대 시대의 문법과 용어로 적었어요. 옛 서적이라면 쓰이는 한자나 어투, 표현 등이 지금과 이질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지금 한국인이 관동별곡이나 신라 향가 보면 머리가 굳는 것처럼요.
11. 각 분야의 자료를 살펴보면, 각 시대의 사회 상태를 대략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책에 기록된 시대의 상황이 실제와 너무 많이 다르다면, 곧바로 가짜라고 단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에 의하면 한민족은 신석기 시대에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환국이라는 대제국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는 국가가 없었으며 사람들은 소규모 공동체 단위로 모여 살았고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한정된 자원의 독점을 바탕으로 상하관계가 고착화되어 국가 단위가 형성되었습니다. 한민족에 무슨 미래인이 전생한 것도 아닌데 이런 보편적 시대 발전을 어길 수 있습니까?
12. 각 시대의 사상은 그 진화 단계에서 한결같이 저절로 정해진 것이 있기 마련인데, 만약 책에서 표현된 사상이 그 시대에 있기 어려운 것이라면 바로 가짜라고 단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에는 근대 일본에서 근대 시민혁명 이후 나타난 서양 문물과 사상을 번역해 만든 한자어인 세계(world), 인류(human), 국가(nation), 권리(right), 산업(industry), 공화(republica), 유신(reformation),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개체(individual),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평화(peace)와 같은 것들이 그대로 실렸습니다. 환국은 시민혁명 이후 나타난 사상을 타임머신으로 공부해 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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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hoon7님의 댓글의 댓글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민초맛치약님의 댓글의 댓글
그래도 우리나라 역사는 나름 기록이 남아있는 편이라고 들은 게, 영국만 해도 거의 7세기 즈음의 인물인 아서 왕도 브리튼 지방의 토착 전설들이 모이고 그 위에 기독교적 각색이 들어간 가상의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죠.
Typhoon7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