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흙수저 공시생의 눈물...(feat.과거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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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12.0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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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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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머리에꽃을님의 댓글의 댓글
@잉여다님에게 답글
과거가 단순히 인재등용만이 아니라.. 귀족들의 기득권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죠
사실 생각해보면 과거제도는 관료주의 체제에서는 굉장히 선진적이고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과거제도는 관료주의 체제에서는 굉장히 선진적이고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귀엽고깜찍한요정님의 댓글
그런데 지방 향시로 소과를 치룬 양반들 중에는 아애 대과에 관심이 없는 이도 많았더랬지요.
귀엽고깜찍한요정네 집안이 그런데. 그냥 소과로 진사나 생원 까지만 하고 그냥 동네에서
공자왈맹자왈 하면서 사셨다나 어쨌다나....
이유는 한양 올라가도 대부분 별 볼일 없고...
가장 중요한 이유중에는 당파싸움에서 져서 지방으로 쫒겨 내려온 케이스라...
관직으로 나갈 방법이 애초에 거의 막혀 있고.
관직으로 나간다 한들 언제 진짜 목아지가 날아갈지도 모를....읍읍읍...
그냥 체면치례나 하면서 다들 사셨다지 말입니다.
다만 이래도 지방에서는 한 목소리 하면서 떵떵거리면서 사셨다고들...
귀엽고깜찍한요정네 집안이 그런데. 그냥 소과로 진사나 생원 까지만 하고 그냥 동네에서
공자왈맹자왈 하면서 사셨다나 어쨌다나....
이유는 한양 올라가도 대부분 별 볼일 없고...
가장 중요한 이유중에는 당파싸움에서 져서 지방으로 쫒겨 내려온 케이스라...
관직으로 나갈 방법이 애초에 거의 막혀 있고.
관직으로 나간다 한들 언제 진짜 목아지가 날아갈지도 모를....읍읍읍...
그냥 체면치례나 하면서 다들 사셨다지 말입니다.
다만 이래도 지방에서는 한 목소리 하면서 떵떵거리면서 사셨다고들...
RanomA님의 댓글의 댓글
@귀엽고깜찍한요정님에게 답글
서울/경기 부근의 경화사족들 제외하고는 중앙에서 자리가 없으니, 지방에서 생원/진사까지만 따서 양반 타이틀 유지하면서, 서원과 결탁해 지방 호족으로 사는 방법이었죠. 중앙의 관리(사또)가 부임해왔는데 맘에 안들게 자기네 기득권 침해하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놓고는, '귀신을 보고는 담이 약해서 죽었네요.' 하기도 하고요.
까망꼬망1님의 댓글
저렇게 관직에 들어가고도 신임 괴롭히기가 또 있었죠.
억지로 술 먹이고 구타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시키는 등 괴롭혀서 죽는 사례도 꽤 있었다고 ㄷㄷㄷ
억지로 술 먹이고 구타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시키는 등 괴롭혀서 죽는 사례도 꽤 있었다고 ㄷㄷㄷ
잉여다님의 댓글
사실 현실은 저거보다 좀 매웠습니다.
과거는 ‘선착순 입장’이었으므로 일찍 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과거 응시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 이유가 있다. 33명 합격에 10만 명 이상 응시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시험문제가 걸리는 곳에 가까운 자리,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자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시험문제에서 먼 자리는 가까이 와 문제를 적어가는 동안 시간이 다 가버렸으니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이었다. 단 며칠 만에(때로는 하루 만에) 수만 장의 답안지를 일일이 채점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대부분의 합격자들이 처음 낸 답안지 수백 장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등장한 사람이 몸싸움을 통해 좋은 자리를 맡는 선접꾼이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전문 직업인(?)이었을 리는 없다. 처음에는 집안의 노비 중에서 힘깨나 쓰는 자가 선접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싸움이 점점 치열해지고 심하면 죽어나가는 사람까지 생기면서 외부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일이 흔해졌다. 결국 과거철이되면 지방의 주먹들까지 대거 상경해 돈푼깨나 있는 집안의 선접꾼으로 지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돈 대신 자신들의 답안지 대리 작성을 보수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선접꾼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부정행위의 머리와 손, 거벽과 사수
거벽이란 요즘으로 치면 족집게 과외선생과 닮았다. 지금과 다른점이라면 조선의 거벽은 대리시험까지 치러준다는 것. 거자가 적어 온 과거 시험문제를 보고 모범답안을 작성하는 것 이 거벽의 일이었다. 거벽이 작성한 모범답안을 깨끗하게 정서하는 것 이 사수의 몫이었고.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 하나. 사수는 그렇다 치고, 거벽은 왜 스스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을까?
과거의 부정을 누가 저질렀는가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상화된 부정행위를 통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권문세가의 자손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출세는 남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가난한 양반이나 애초에 출세가 막혀있던 서얼 출신의 경우에는 과거 급제보다 거벽으로 돈을 버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조선 후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 이 지금처럼 힘들었던 모양이다.
...
다만 동시기 서양도 가장 진보된 영국의 관료제가 공인된 매관매직이였으니 그것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