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왜 '핫세'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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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필 23.♡.26.41
작성일 2024.12.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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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한 올리비아 핫세(허시) 배우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올리비아 핫세는 68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해졌고, 그 미모로 청순가련한 여배우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했습니다. 저도 어릴 적엔 이상형이 올리비아 핫세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그 때, 어려웠던 외국 이름을 외우면서 말이죠. 올리비아 핫세, 올리비아 핫세, 줄리엣, 올리비아 핫세.


그녀의 이름은 왜 올리비아 '핫세'였을까요. 그 이름의 영문 표기를 찾아보면 Olivia Hussey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했던 배우이니 활동 무대에서 불리는 그대로 차용하자면 올리비아 '허시'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 대부분(저를 포함)은 그녀를 올리비아 '핫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꺼무위키를 찾아보면 일본어 표기의 영향을 받아 그러하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 한국 언론에 소개될 때는 어떻게 됐을까 자료를 짧게 뒤져봤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찾아본 1969년 7월 26일 매일경제의 기사입니다. <로미오와 쥬리엣>에 출연한 두 배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주의 이름은 레오날드 화이팅(;;;), 여주의 이름은 오리비아 핫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연 배우의 본명을 한국어로 표기하면서 아마도 일본 출처의 자료를 참고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핫세'라는 부분도 그렇지만 올리비아가 아닌 '오리비아'를 보면 더욱 그러해 보입니다.


그래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핫세'라고만 검색해보면 많은 검색결과가 뜹니다. 올리비아 핫세의 이름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의 이름도 핫세라고 표기되어 소개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무래도 과거에는 일본어를 중역한 자료가 많았고 영화의 보도자료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수 있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올리비아 허시'라고 보다 원음에 가까운 표기를 검색했더니 다음과 같은 다소 놀라운 기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970년 신년호로 발행된 경향신문입니다. 새해 소망을 소개하는 특별기사에 나온 올리비아 핫세의 인터뷰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불과 몇 개월 차이로 발행된 이 기사에서 그녀의 이름은 '올리비아 허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기존에 소개되던 '오리비아 핫세'가 아닌 원음에 가까운 표기를 차용한 것을 보면, 기자 혹은 데스크에서 신경을 쓴 것 같습니다.


과거 신문에는 '올리비아 핫세'만 있었을 것이라던 제 예측과 달리 '오리비아 핫세'와 '올리비아 허시'는 병존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이름은 두 표기가 묘하게 합쳐져서 '올리비아 핫세'라는 형태가 됐습니다. 일본어 자료에서 차용한 듯한 표기와 원음에 가까운 그것이 합쳐져서, 기묘한 형태가 됐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지 그녀의 사망 소식을 다루는 기사에서도 이름에 대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예시로 한국일보 기사를 보겠습니다.


캡쳐된 기사 말미에 보면 '핫세'라는 표기의 연원을 "일본식"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올리비아 핫세의 사망 기사를 찾아보면 대다수의 기사들이 '핫세'와 '허시'를 동시에 표기하면서 왜 한국에서는 '핫세'라고 소개됐는지 다루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문기사도 있습니다. 바로 조선일보 발 기사입니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답게(?) 해당 이름 표기의 연원을 소개하지 않으며 딱 한 군데를 제외하고 핫세로 표기하고 있습니다(굳이 확인해보시겠다면 여기입니다. 

https://www.chosun.com/entertainments/enter_general/2024/12/28/QNKIIZIALNBTBN2J67WLEV2F3Y/). 이름 표기의 연원을 설명하는 건 기사 주요 내용에 있어서 부차적인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지간한 다른 신문사에서는 다 있는 부분이 조선일보에는 없다는 건 참 흥미롭습니다. 그녀의 이름 표기가 일본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굳이 소개될 필요는 없지만, 왠만하면 다루고 있고, 그걸 생략한 언론사는 조선일보라는 것. 재밌는 일입니다.


꺼무위키에 소개된 사실, '올리비아 허시'가 '핫세'가 된 것은 일본어 표기를 차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마 맞는 사실로 보입니다. '오리비아 핫세'라는 일본어같은 표기에서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올리비아 허시'라는 보다 적절한 표기 역시 도입됐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핫세'는 '허시'를 이겨내고 몇 십년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결과는 아마도 언론에 의한 것일겁니다. 최초의 보도자료는 일본어 자료를 번역한 중역 자료였을 것이고, 언론은 이 표기법에 대한 확인을 별도로 하지 않은 채 '허시'를 '핫세'로 계속 사용해왔던 탓일 겁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해프닝이지만, 언론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기 때문에 창문에 의해 굴절된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허시'가 '핫세'로 남은 건 말이죠.


언론은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한 배우의 이름이 다소 잘못 표기되는 건 해프닝이지만, 내란을 내란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해프닝이 아닙니다. 민주시민의 인식을 굴절시키고 공론장을 어지럽힙니다. 적확한 용어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행위 하나로 말이죠. 내란을 내란으로, 반란을 반란으로, 위헌을 위헌으로 바르게 소개하는 언론지형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리하지 않는 언론은 공론장에서 쫓아내야 맞습니다. 그게 민주사회를 위한 길입니다.


올바른 이름을 불러주는 것, 바른 역사를 되찾는 것, 왜곡된 해석기제를 바로 잡는 것. 모두 언론을 바로 세울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김어준 총수가, 유시민 작가가, 매불쇼와 최욱, 그외 민주진영의 언론과 유튜브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댓글 15 / 1 페이지

kissing님의 댓글

작성자 kissing (121.♡.79.213)
작성일 12.29 09:14
이해가 안가는게 나왔을때 일단 일본을 의심해보면 높은 확률로 맞더라구여. 지금 국힘 하는 짓만 봐도 딱 나오죠.

대로대로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대로대로 (222.♡.13.28)
작성일 12.29 09:14
정말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육일사님의 댓글

작성자 육일사 (49.♡.160.66)
작성일 12.29 09:23
닉네임에 잘 부합하는, 수필처럼 술술 읽히는 명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에러맛스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에러맛스타 (116.♡.230.113)
작성일 12.29 09:26
올리비아 허시 배우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dante2k님의 댓글

작성자 dante2k (209.♡.53.254)
작성일 12.29 09:26
짧지 않은 글이 술술 읽히고, 글쓴이의 의도, 주장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읽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더도 덜도 말고 이런 기사가 많이 늘었으면 합니다.
기레기들아~~ 여기 니들이 보고 배워야 하는 좋은 기사의 예시가 있단다.

96230991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96230991 (112.♡.146.204)
작성일 12.29 11:46
@dante2k님에게 답글 중간쯤까지 보다가 댓글로 내려와서
dante2k님의 댓글을 읽고 다시 본문을 읽었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본문님. 잘 읽었습니다
본문님 저같은 사람을 위해 미괄식도 좋지만, 두괄식도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헤시만 읽고 지나갈뻔했습니다 ^^

망해라왜국신문

YNWA님의 댓글

작성자 YNWA (211.♡.5.240)
작성일 12.29 09:34
기사보다 더 기사같은 좋은 글이네요. 스테픈 커리가 스테판 커리로 불리는 것도 자말 머리가 자말 머레이로 불리는 것도 다 이런 탓이죠

은비령님의 댓글

작성자 은비령 (175.♡.75.77)
작성일 12.29 09:44
평생 몰랐던걸 이 글 하나로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nilium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nilium (121.♡.216.42)
작성일 12.29 09:49
근데 한번 굳어진 표기가 바뀌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본어식이든, 콩글리시식이든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스칼릿 조핸슨 같은 표기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깐요.

맥아더, 몽고메리 등도 일본을 거쳐 수입된 흔적입니다. 원음을 살리자면 매카서, 몬트거머리 등이 되어야합니다.

포니님의 댓글

작성자 포니 (112.♡.175.146)
작성일 12.29 10:05
지금의 한글로는 외국 발음을 그대로 차용하여 표기하기가 불가능 하다고 생각 합니다...
올리비아 허세이 오와 어 사이에서 오에 가까운 올 자와 허세이 도 세의 ㅔ가 묵음에 가깝게 처리 되어 허ㅅ ㅣ 처럼 들리네요
https://dict.naver.com/tts?speech_fmt=mp3&speed=50&service=enendict&from=pc&speaker=en_uk&text=Olivia Hussey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96230991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96230991 (112.♡.146.204)
작성일 12.29 11:49
@포니님에게 답글 없어진 글자 살려내면 좋겠어요
덧붙여 성조도요

aeronova님의 댓글

작성자 aeronova (172.♡.201.54)
작성일 12.29 10:13
비슷한 예로 마가렛 “대처“도 있습니다. 번데기 발음으로 “새처”가 맞다고 알고 있어요

장군멍군님의 댓글

작성자 장군멍군 (58.♡.46.177)
작성일 12.29 10:29
해리포터의 귀요미인 '헤르미온느'도 알고 보면 전혀 다른 발음이었죠
정확한 발음은 '허마이니'인데 이상하게 굳어진..

지하철승객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지하철승객 (117.♡.14.53)
작성일 12.29 10:43
베트남도 그렇죠 뭐...

패왕상후권님의 댓글

작성자 패왕상후권 (59.♡.65.140)
작성일 12.29 10:56
올해 초 이재명 대표에 대한 암살시도를 끝까지 '피습'이라고 표현하면서 말장난을 쳤지요.
박근혜에게는 테러라고 한 전례를 무시하면서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그랬습니다.
시작은 윤석열 정부지만 언론들도 여기에 부역한 이들입니다.
언론들 역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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