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국수본 건물이 나오니 어릴 때 추억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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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홍성아재 112.♡.175.67
작성일 2025.01.11 23:03
801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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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국영 화학공장에 근무하시던 저희 아버지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하루 아침에 해고되셨습니다. 서울의봄 당시 노동자협의회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비롯해 30명이 모두 한날한시에 해고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노동자 동료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화학 전문 노동자들이었음에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국영공장이나 대형 공장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아버지는 저희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셨죠. 갑작스러운 해고로 크게 낙담했던 아버지는 지금의 경찰청(국수본은 바로 옆 별관에 있다네요), 예전 치안본부 옆에서 마포갈비집을 했던 고모의 권유로 경찰청 바로 뒷골목에서 여인숙을 하셨습니다.

주된 손님은 당시 치안본부로 연수 받으러 왔던 지방 경찰관들이었습니다. 고모집에서 술 한 잔 걸친 그들은 저희 여인숙에 와서 잠을 청하곤 했죠. 어머니와 두 분이서 그렇게 방 청소하고 밤 새우시면서 돈을 꽤 버셨지만, 나중에 모은 돈을 작은아버지가 가로채 한때 길거리에 나앉기도 했습니다.

여인숙 위치가 서대문 독립문 근처라 근처 살던 친구와 종로, 광화문도 걸어가보고 마포도 걸어다니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근에 경기대학교도 있었고, 이화여고도 있었고 무엇보다 푸른극장, 화양극장이 있어 어린아이가 영화 보러 다니기 딱 좋았습니다. 지금은 서소문아파트 빼고는 거의 다 재개발이 되었지만 예전에 70년대 개량한옥에 좁디좁은 골목이 있었던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초반에는 번화가 공기가 너무 안좋아 제게 병이 생긴 적도 있었습니다. 기관지에 병이 생겨 현저동에 있는 병원에 드나들기도 했죠. 나중에 서울 변두리로 이사가며 병은 없어졌습니다. 

저희 가족이 살기는 거기 살았지만 누나랑 저랑 동생이랑 학교는 구로구나 관악구 쪽으로 다녔습니다. 버스 타고 한 시간 넘게 학교로 향했죠. 서울에 처음 와서 구로구, 지금의 금천구에 잠시 자리를 잡았었던지라 학교들을 다 그쪽으로 다니고 있었는데 경찰청 뒤로 이사한 다음에도 학교를 바꾸질 않았어요. 80년대 초반에는 정말 전학이란 게 특히 중,고등학교 전학이 쉽지 않았습니다. 누나들 때문에 저도 결국 구로구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중에 관악구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경찰청 뒤에서 한 1년반 정도 살다가 신림동, 예전 난곡(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죠)으로 이사가면서 그 동네와의 인연을 마쳤습니다.

댓글 4 / 1 페이지

slowball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slowball (223.♡.91.195)
작성일 어제 23:08
봉천동에서 봉사활동 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난곡은 모를 수가 없죠. 사람이 너무 많아 재개발을 못하던 동네

홍성아재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홍성아재 (112.♡.175.67)
작성일 어제 23:11
@slowball님에게 답글 난곡 달동네에서 서울대로 넘어가는 산 고개가 있었는데 1982년도에는 거기에 화전민이 살아 소로 쟁기질을 했었습니다. 거기 갔다가 믿기지 않던 장면에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Cinder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Cinder (118.♡.12.135)
작성일 어제 23:29
@slowball님에게 답글 봉천에서 봉사 하셨으면 혹시 실로암 다니셨을까요?!

slowball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slowball (223.♡.91.195)
작성일 어제 23:32
@Cinder님에게 답글 아니요. 장애있는 어린이들 보육시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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