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잔인한 칼국수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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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50입니다. 애 둘 엄마이면서 아내이고, 월200버는 대학 강사입니다. 그래도 주제에 해외 박사출신입니다. 인문학이라서 아직 자리도 못잡고 이렇게 있지만요.
어제 오후 늦게, 지원한 전임교수 자리 불합격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적응할 만도 한데, '불합격' 세 글자는 아직도 쉽고 빠르게 접수가 안됩니다. 지원을 위해 애쓴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12월과 1월 두 달을 온통 지원서 작성, 공개강의, 1차와 2차 면접에 쏟아부었거든요. 한단계씩 합격을 확인하고 그다음을 준비하면서 설레였고, 그렇게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는데...혹시나 이번에는?? 했던 기대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문자로 불합격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정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아마 다 느껴진 거 같아요. 아예 1차 서류에서 떨어졌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까요?
그렇게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꼬박 날밤을 새웠는데 아침이 되어도 말똥말똥 졸리지 않더라구요. 남편 출근하고, 애들 아침 씨리얼로 대충 챙겨 먹이고, 저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들고 일자리 구직란을 목적도 없이 스크롤을 했습니다. 정말 어디 구내식당에 가서 주방 보조라도 해야 하는건 아닌지...싶은 마음까지 들었어요. 그렇게 두 세 시간 훌쩍 멍때리면서 날려보내는 중에, 방학이라 집에 있는 두 아이가 저기압 상태인 엄마 눈치 보느라 아무 말 못하고 부엌을 몇 번 오가면서 냉장고 문을 여닫는 낌새를 느꼈습니다.
아...점심 밥시간이구나.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코스트코 세일가로 사온 비비고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서 아이들 주고, 저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입안에 퍼지는 칼칼한 국물, 냉동 음식 같지 않은 쫄깃한 바지락...왜 이렇게 맛있나요ㅠ 세상 다 잃은 듯한 패배감에 분명 몇 분전까지만해도 참 힘들었는데, 단숨에 그 힘듦을 저만치 쫒아내버렸습니다. 뭔가 혼란스럽고 잔인한 느낌마저 드는 맛이었어요.
한 그릇의 칼국수로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오전 내내 다시 도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따뜻한 칼국수로 마음이 달래지네요.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도 같구요. 인생이 만만치 않아, 늘 어려운 문제 해결의 연속인 듯 해보여도, 몰아세움 중간 중간에 또 이런 작은 기쁨을 주기도 하죠.
혹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 맛있는 음식 드시고 털어버리세요. 화이팅입니다^^
p.s., 법카로 빵집 전세 낸 듯 빵 사대고, 와인 쟁여놓는 그런 사람은 승승장구 잘만 하는데...저처럼 여러분처럼 정직하게 성실하게 바른 철학으로 살아가는 민주시민들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RubyBlood님의 댓글
멋진 어머니이자~ 멋진 사람입니다!
마루날님의 댓글
박사 논문 시작도 못한 박사수료생입니다.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향해 가고 있어서 이 나이에 박사가 무슨 의미있나 싶습니다만, 따고 싶습니다.ㅠㅠ
상추엄마님의 댓글
꼭 안아드리고 싶었는데 칼국수가 먼저 안아드렸네요
앞으로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껍니다!
technovation님의 댓글
저보다 한두살 누님이시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그 마음 조금이나마 헤아려 봅니다.
마음에는 평안이, 신체에는 건강이, 정신에는 강건함이 함께하는 2025년 되시길 기원합니다.
닝기리밍밍님의 댓글
제 일 같이 속상하기도 하네요.
다시 시작해 보시죠. 더 좋은 결과 있을 것 입니다!
밝은계절님의 댓글
끊임없이 바위를 산위로 굴려 올리지만, 또다시 미끄러져 내리는....
하지만 어떤 일이던지 지치지만 않으면 좋은 결과는 반드시 만들어 질겁니다.
힘내시길 빕니다.
단아님의 댓글
하지만 전 다시 공부는 못할것 같아요..ㅎㅎ 계속 끈을 놓지 않으시는것만으로도 참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여러 이유로 놔버린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해내셨으면 좋겠어요.
Ps. 급 바지락 칼국수 땡기네요. ㅎㅎ
colashaker님의 댓글
가치있는일이 지금, 그곳.. 에만 있다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고있는 모두를 위로하고.. 응원합니다.
충분히 멋진 인생이신가 같아요!
앞으로 더 멋져 지실테니.. 보는 사람도 행복해 집니다!
YBman님의 댓글의 댓글
15소년우주표류기님의 댓글
미자르님의 댓글
무우의식님의 댓글
가랑비님의 댓글
혹시, 그 긴 여정이 즐겁게 기억된다면,
80점은 넘겼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 ㅎㅎ
WinterIsComing님의 댓글
A대학, B대학 학부출신 교수들이 각각 자기네 모교 후보자들 놓고 팽팽하게 맞서다가
정치적 안배, 화해의 의미로 전혀 엉뚱한 C대학 출신을 선발 하기도 했죠.
이렇듯 본인 귀책이 아닌 엉뚱하고 통제불가능한 변수가 작동하기도 하니, 너무 상념치 마시고 계속 진행 하시길 바랍니다.
쿨링팬님의 댓글
회색라이더님의 댓글
하고 싶었는데 못했으니 가보고 싶지만.. 가 보면 막상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으니.. 지금 하시는 일에 만족하시면서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위로를 드립니다..
글속에 모든게 절절히 들어있네요..
지미니쓰님의 댓글
농담이에요~ ㅎㅎㅎ
좋은 날 옵니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좋은 날일수도 있구요. 화이팅
구르는수박님의 댓글
인문학 교수님이라 그런가 글이 술술 잘 읽히네요.
또 도전하십쇼!
잘 될겁니다!!
인생은경주님의 댓글
칼국수 좋아하시면 대전에 바람쐬러 오실때 드셔보세요.
Carpediem™님의 댓글
너무 소박하게 있어 우리가 못 보고 지나치는 것 같아요.
PTSD님의 댓글
적어도 나 웃는날 그 옆자리엔 이런 상식적인 사람들만 있게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레츠고나우님의 댓글
유리멘탈님의 댓글
저도 나이가 있어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힘들지만...집에 남은 가족들을 보며 힘을 내봅니다.
다른 좋은 자리를 위해 잠시 쉬어가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힘 내세욧!!
감정노동자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