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웠던 부다페스트의 자유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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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중심부에 자유광장(Szabadság tér, Liberty Square)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한적하고 참으로 멋진 곳이예요. 누구는 광장이라 부르고 누구는 공원으로 부르기도 하나봅니다. 관광 명소가 많이 모여있는 시내 한가운데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데도 비교적 조용하더군요.
제가 8년 전에 부다페스트에 갔을 떄에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린 곳입니다. 거기에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있어서 ‘왠 레이건?’하고 그냥 사진만 찍고 지나쳤습니다. 이번에 다시 부다페스트에 가면서 그 광장의 이름이 자유광장이며 이 광장에서 재미난(?) 것은 레이건 뿐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광장에는 1차 대전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헝가리 주변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고 파견했던 미국의 장군 해리 힐 밴더홀츠의 동상이 있습니다. 헝가리는 루마니아한테 땅을 많이 빼앗긴 입장이라 국민 감정이 별로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밴더홀츠는 루마니아 군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물러나면서 국립 박물관에 있는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보물을 가져가려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고 합니다. 헝가리인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지켜줬다고 이 미국사람의 동상을 세워주었다죠.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에 역사적으로 긴 영토 분쟁 및 민족 갈등의 중심지였습니다. 이후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이 상은 잘 보이지 않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이 공원으로 오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공원 한쪽에는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적군(Red Army) 기념비가 있습니다. 이 나라가 공산권 국가였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이 즈음에서 이 광장에 점점 호기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소련과 같은 동구권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소련이 헝가리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지 않았던가요? 부숴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네요?
공원의 한쪽 끝에는 레이건의 동상이 있습니다. 레이건이 냉전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을 기념하고자 세웠다고 합니다. 아니… 소련 적군 기념비는 내버려 두고서 말이죠? 아마 기념비를 부수는 대신 그 바로 앞쪽에 반대되는 상징을 세우는 것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레이건 동상에서 조금만 가면 조지 부시의 동상이 있습니다. 아니, 왠 조지 부시랍니까?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그 난리를 피운 부시 말입니다. 소련에 아무리 적개심이 강해서 미국이 좋아졌어도 그렇지 조지 부시라니요? 이 즈음되어 저도 뭔가 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부시의 동상 뒷편에는 다른 건물과 달리 유난히 철조망이 높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딱 봐도 다른 건물에 비해 훨씬 더 관리가 잘 되어 보입니다. 바로 미국 대사관입니다. 미국 대사관은 전세계 어디를 가도 시내 가장 몫 좋은 곳에 있더군요.
광장의 또다른 쪽에는 헝가리가 독일에 침공당한 것을 잊지 말자는 차원에서 세워둔 기념물이 있습니다. 헝가리를 상징하는 여신이 손에 쥔 구를 실수로 떨어뜨리는데 이걸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가 낚아 채어가려는 듯이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념물 앞에는 수 많은 사진과 글귀가 다국어로 적혀있습니다. 헝가리 정부의 입김이 들어간 이 기념물은 마치 헝가리가 독일에게 점령당한 희생자인마냥 포장하는데, 사실 헝가리는 희생당한 것이 아니라 나치의 적극적인 협력자였다고 쓰여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반유대인 정책을 펼친 나라이며 나치가 부다페스트에 들어왔을 때에는 거의 축제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절대로 속아서는 안된다며 나치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문서 등을 코팅해서 기념물 주변에 놓아두었습니다.
아… 이 나라는 지리적인 이유로 나름 꽤나 괴로웠겠지만 나름 살려고 여기저기에 많이 붙어도 먹었구나… 라고 생각하던 차에
뭔가 분위기가 다른 스티커가 몇 개가 보입니다. 재작년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진이 담긴 스티커였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제 머릿속은 매우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당시에 유태인들이 이유 없이 죽은 것은 역사적 비극이고 나치가 잘못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그 유태인들의 희생과 현재 이스라엘은 좀 결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최근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개차판 짓을 하는 것도 세상이 다 알잖아요? 희생된 민간인은 참 불쌍하고 위로받아 마땅합니다만 현대 이스라엘과 당시의 유태인을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이상하죠. 마치 이스라엘 사람은 무조건 건들지 말아라 하는 것 같잖아요. 자기들은 주변 국가 사람들을 얼마나 죽였는데 말이죠.
정신적 혼란을 안겨준 자유광장을 떠나 다뉴브 강가로 가서 그 유명한 신발 조형물을 보았습니다. 전날에는 밤에 갔는데 낮에 보니 많이 달라보이더군요. 저야 8년전에 봤지만 이번에 같이 간 사람은 처음 보는지라 막 마음이 찢어지려고 하던 찰나에 뭔가 또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무슨 스티커가 이리도 많으며 그게 다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더군요.
자유광장에서 보았던 하마스 공격 희생자들에 대한 스티커와 같은 종류였습니다. 여기는 자유광장보다 훨씬 더 많은 스티커가 매우 넓은 장소에 걸쳐 붙여져 있었습니다. 희생자의 얼굴, 태어난 년도와 죽은 년도 등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어 잘 몰랐는데 영어로 된 것이 몇 개 있어서 그게 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마스에 의해 희생된 이스라엘 희생자들도 참 불쌍한데 현대 이스라엘의 비극을 2차 세계대전 유태인의 핍박과 동일선상에 두고 기억하려고 하는 그들의 시도가 매우 불쾌했습니다. 마구마구 슬퍼지려는데 갑자기 매운맛 현실을 깨달은 셈이랄까요. 그 스티커를 안 봤더라면 다뉴브강의 그 신발은 여전히 눈에는 잘 안 띄지만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조형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미지가 다 깨져버리고 말았어요.
나라가 힘이 없고 침공을 당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라가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고 누군가에 기대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정리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8년전에 비해 너무나 올라버린 헝가리의 물가 만큼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PWL⠀님의 댓글의 댓글
저 광장의 꽃과 글씨는 2차 대전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고 거기에 하마스 희생자에 대한 스티커가 몇 개 불어있었습니다. 다뉴브 강의 신발 주변에는 하마스 희생자들에 대한 스티커가 정말 다닥다닥 많이 붙어있었어요.
은비령님의 댓글의 댓글
그냥 업무적으로 엮인 사람이 힘들어서 도시를 제대로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게 컸습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하며 다뉴브강의 반짝이는 물결 옆으로 드라이브 한건 참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PWL⠀님의 댓글의 댓글
RPhF님의 댓글의 댓글
알아야면장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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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L⠀님의 댓글의 댓글
물가가 오르고 있는게 맞죠? 올라도 진짜 너무 심하게 올랐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은 폭증한 것 같고... 또 다른 면으로 궁금해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알아야면장님의 댓글의 댓글
운하영웅전설A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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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폭망이라 해외 의존으로 인플레는 장난 아니고 부가세가 근 30%입니다.
정치는 극우로 갈 가능성 높은 독재자 오르반의 장기 집권이 지속 중이고...
유럽 역사가 복잡하니 헝가리 또한 본인들의 과거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국뽕들 많은 것 같고요.
어째 투자는 많이 들어오는데 최종적으로 잘 풀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은비령님의 댓글
작년에 글을 올렸었지만 작년엔 별로인 도시였는데 시간이 지나니 일이 아닌 여행으로 다시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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