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독립전쟁 왕당파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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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지금이야 미국독립전쟁이 옛날에 있었던 일 중 하나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당시만 해도 충격적인 일이었죠. 대부분의 국가에서 왕이 다스리는 그 당시에, 촌구석 식민지 신민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쇼킹한 소식이었죠. 그나마 미국은 바다 건너 촌구석이었지만, 프랑스는 서유럽 군사력 1위 왕조였으니 다른 나라들이 혁명 막으려고 쳐들어오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으로선 다행(?)한 일이었죠.
미국 13개 주가 독립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미국 땅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 독립전쟁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독립전쟁 찬성파는 애국파로 불렸는데, 40~45%였다고 추정되고, 비슷한 수가 무관심층이었으며, 10~15% 정도가 독립전쟁 반대파, 충성파, 왕당파로 불렸던 사람들이죠. 그리고 이 왕당파들도 구성이 다양해서 독립은 시기상조다부터 열렬한 국왕 만세주의자까지 다양했습니다. 종종 다른 역사에서도 벌어진 일이지만, 아버지가 애국파인데, 아들은 왕당파인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독립을 위해 크게 활동한 외교관이었지만, 반대로 그 아들은 왕당파 군대를 조직해서 영국군과 함께, 대륙군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왕당파와 애국파를 오간 사람도 많았구요. 백인도 말고도 흑인도 있었습니다. 영국이 협력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거든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남부전역에서 나름 전과를 많이 올렸는데요, 그러나 그것도 킹스 마운틴 전투에서 남부 민병대가 크게 패배하고, 나다나엘 그린 같은 뛰어난 장군 아래에서 대륙군이 전면전 대신 치고 빠지면서 피해를 주는 전략을 편 탓에 영국군은 남부에서도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건, 이 왕당파들에 대해 숫적으로 압도적인 애국파들의 감시가 매우 치밀하고 암암리에 무력행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던 데다가, 왕당파들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았고 영국군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형태였기 때문에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들 아시듯 요크타운 전투를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미국은 독립을 성취하였습니다. 독립 이후 왕당파들은 캐나다나 영국, 카리브제도로 도망치긴 했으나 많은 이들은 그냥 미국 땅에 남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초기에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한다든지 처벌을 하려는 시도가 당연히 있었습니다만, 점차 그런 분위기는 희석되어 갔습니다. 왜냐하면 왕당파들의 많은 수가 뜨뜻미지근한 시기상조론을 펴는 온건파들이었고, 해밀턴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왕당파 온건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점점 재산몰수 같은 처벌은 사라지고, 골수 왕당파는 거절하더라도 온건파는 환영하는 형태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이 발생할 때에는 처벌 규정 같은 것은 모두 사라졌다고 하네요. 이렇게 된 것은 왕당파가 소수기도 했고 온건파들이 다수였으며 전쟁에는 미온적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전반적으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웃집 찰스 아저씨랑 메리 아줌마랑 싸우는 걸 별로 안 좋아했던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