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에 이어오늘도 같은 주제로 올려봅니다.
김복동 평화상을 만들고, 노벨상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시민언론 민들레 기사에서 하더군요. 공감이 갔습니다.
"이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상은 진작에 그 수명을 다했다. 미련 없이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야 마땅하다. 대신에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 지배, 국가폭력과 집단학살의 가장 큰 피해자들, 그리고 그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온 이름 없는 투사들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평화상이 필요하다.
이미 윤미향 전 의원은 "생존자로 평화와 인권을 위해 싸우고 살며 죽기 직전까지 그 일을 위해 목소리를 내다 가신 김복동! 김복동이 평화의 기준이고 상징이 되어야 한다"라면서 '김복동 평화상'의 필요를 주장해 왔다. 2025년 오슬로의 치욕적인 결정과 기만적인 정치쇼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새로운 상상력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일깨워준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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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작성자 글 보기: 임승수
이번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이 혁명 과정을 뒤엎기 위해 미제국주의와 베네수엘라 기득권층이 내세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노벨평화상을 트럼프에게 바치고 싶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노벨상의 서구 중심성과 편향성을 비판하며 수상을 거부한 장 폴 샤르트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다.
<미제국주의 침략의 도구가 된 노벨평화상>
올해 노벨평화상은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게 돌아갔다. 이 결정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네수엘라가 지나온 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좀 긴 글이지만 꼭 읽어주기 바란다).
인구 2,800만 명, 남한의 10배 가까이 되는 면적으로 남미의 최상단에 위치한 베네수엘라. 막대한 산유량으로 축복 받은 나라이지만, 1920년대에 석유가 발견된 이래 그 축복은 주로 미국 기업이 누렸다. 석유 재벌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앞세워 베네수엘라에 석유 파이프를 꽂아서 모두 미국으로 빼냈고, 1999년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도 베네수엘라는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 거의 석유를 팔아본 적이 없을 만큼 미국에 종속된 사실상의 식민지였다. 미국에 빌붙은 일부 엘리트 계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과거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정치가 가장 안정된 국가로 평가되었다. AD와 COPEI 라는 두 당이 번갈아 집권을 하면서 소위 미국식 양당정치가 확립되었고, 1950년대 이후로는 남미에서 흔히 일어나는 쿠데타 같은 것도 없이 안정된 정치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실상은 AD, COPEI 로 대표되는 보수 양당이 1958년에 양당의 권력 분점을 합의한 Punto Fijo 협약을 맺어 정치권력을 나눠 먹으며 수십년간 베네수엘라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에서 소외되는 상황이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즉 국가전략산업의 민영화, 사회보장제도 및 공공부문 축소 정책 등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따라 급격하게 사회양극화가 진행되어 빈부격차는 더욱 극심해지는데 켜켜이 쌓은 그 정치경제적 모순이 1989년 2월 "카라카소(Caracazo)“ 민중봉기를 통해 한꺼번에 폭발하게 된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새롭게 당선된 페레즈 대통령이 IMF에서 권고하는 과격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도입했는데 그 결과 교통비는 며칠만에 두배로 오르고 모든 물가가 엄청나게 올라 버렸다. 격분한 시민들이 베네수셀라 수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상점을 약탈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페레즈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수천명을 학살하면서 이 폭동을 진압한다.
이쯤에서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1954년에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꿈은 야구선수였다. 야구를 제대로 하려면 수도인 카라카스에 있는 야구단에 들어가야 하는데, 집이 워낙 가난해 수도인 카라카스에 근거지를 마련할 유일한 방법은 사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 사관 학교는 우리나라 옛날 육사처럼 집안은 가난하지만 똑똑한 사람들의 출세 코스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 학교에 입학한 차베스는 우연히 진보적인 사회과학 책들을 접하면서 베네수엘라가 처한 모순적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진보적 세계관을 갖게 된 차베스에게 사관학교는 모순 그 자체였다. 심지어 제식훈련을 하며 중남미를 침략한 콜럼버스의 동상에 경례를 붙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은 선주민 저항운동가의 동상에 경례를 붙인다). 차베스가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맡은 임무는 좌익 게릴라를 잡는 것이었다. 1959년에 쿠바혁명이 성공하면서 남미의 좌파 중에서는 게릴라 노선을 채택한 이들이 많았고 베네수엘라의 좌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정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고 있던 차베스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상부에서 한 지휘관이 차베스의 부대로 파견을 와서는 부하를 시켜서 농민 여럿을 잡아다가 의자에 묶어 놓고 고문을 하다 살해했다. 좌익 게릴라를 소탕했다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애먼 농민을 잡아다 죽인 것이다. 차베스는 이 사건으 계기로 군대를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물리학을 전공해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던 형 아단 차베스에게 전화로 상담했는데, 그때 형이 혁명조직인 베네수엘라혁명당(PRV)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을 통해 PRV 지도자를 만난 차베스는 군대에 남아 혁명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우고 차베스는 승진도 미뤄가면서 5년 동안 사관생도를 가르치는 정훈 장교로 일하며 동지를 규합해 나갔다. 그렇게 군부내에 MBR-200(볼리바르 혁명운동 200) 혁명운동을 조직한 우고 차베스는 카라카소 민중봉기가 터졌던 당시의 군대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 비극(카라카소)이 있고 며칠 후 나는 정치학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있던 대학에서 돌아왔습니다. 책들을 가지고 숙소로 쓰던 화이트 팰리스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젊은 장교가 갑자기 다가왔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말하더군요. “소령님,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젊은이는 말했습니다. “소령님, 그들은 당신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들은 볼리바리안 운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의하라는 얘기를 들은데다가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른 체하고 “길에서 들리는 말로는 자네가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던데”라고 대답했지요. 그는 자기가 ‘카라카소‘ 학살 동안 대통령궁을 순찰하던 당시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상점을 털고 있던 여러 아이들을 잡아서 인근에 있는 야구경기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들을 억류하고 있었지만 나쁜 감정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오후쯤에 아이들을 풀어줄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부로부터 아이들을 티우아나 기지나 DISIP(비밀경찰) 본부로 호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령에 따라서 DISIP의 요원에게 그들을 인계했습니다. 중위는 병력을 모아서 다시 순찰을 위해 돌아갔습니다. 30분 뒤에 아이들 모두가 골목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살해당한 채로요. 그는 아이들을 보고는 분노로 눈물을 흘리며 항의해 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조용히 하라는 말과 간섭하지 말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고 말했습니다. “소령님, 들어보세요, 당신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면 그렇다고 얘기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나는 보안상의 이유로 그날 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 또한 그런 일에 반대한다는 정도로 얘기해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청년을 잘 알고 있는 동지들로부터 그 청년에 대해 좀더 들었습니다. 그는 결국 운동에 가담하고...(중략)...소위 민주주의자라고 불리는 정치지도자들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떠들었습니다. 어떤 민주주의요? 이곳에는 전정한 독재만 있었지 민주주의는 없었습니다. 과두지배 세력의 정부는 인민을 세뇌시키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언론과 군대를 이용했습니다. 이곳에 민주주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정권에 불만을 가진 수많은 군인들이 MBR-200에 가담을 하게 되었다. 당시 베네수엘라 군대 규모가 한 25,000명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10퍼센트가 이 혁명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차베스는 공수부대의 지휘관이었고, 동지 중에 기갑 부대 지휘관도 있었다. 군의 핵심 물리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차베스와 혁명동지들은 1992년 2월 4일에 목숨을 걸고 페레즈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차베스의 군대가 먼저 일어나서 대통령을 체포하고 주요 기관을 장악하면 민간 운동진영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데모를 하는 것으로 작전을 짰다. 이렇게 군과 민간의 연합작전으로 계획되었지만, 당일에 민간 운동진영 측에서 거리로 진출하지 않으면서 군대만의 쿠데타가 되어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봉기는 실패한다. 군인 10퍼센트가 움직였다지만 주요 기관을 장악하는데 실패했고, 봉기에 가담하지 않은 나머지 90퍼센트 군대와 교전을 벌여 봐야 중과부적인 상황이었다. 무의미한 살상을 피하기 위해서 차베스는 정부 측과 교섭을 하고 기자 회견을 열었다. ‘혁명 운동에 나선 동지들 너무 고맙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무의미한 살상을 피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무장을 해제해라. 나중에 더 좋은 때가 올 거다.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다 지겠다’라고 연설을 하고 체포되었다.
이 방송을 본 국민들은 크게 감동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나는 군인이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나라를 망쳐 놓고도 한 명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차베스는 전국구 인물이 되었다.
민심을 잃은 페레즈 대통령은 얼마 후 부패혐의로 탄핵을 당했고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라파엘 칼데라는 1992년 쿠데타를 시도한 사람들을 석방하게 된다. 온 국민이 쿠데타를 시도한 군인들을 지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라파엘 칼데라는 보수 양당중 하나인 COPEI를 창당한 보수 정치인이지만, 당시 탈당해 무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AD와 COPEI 간판으로는 득표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 보수 양당 정치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석방된 차베스는 군부 내의 혁명세력과 진보적인 시민세력을 규합하여 MVR(제5공화국운동) 을 창당하고, 여러 군소진보정당들을 애국기둥이라는 선거전선체로 묶어서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56%에 이르는 역대 최다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AD와 COPEI 두 보수정당이 번갈아 가면서 집권하던 베네수엘라는 차베스가 이끄는 MVR에 의해서 새로운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다.
차베스는 당선되자마자 공약으로 내걸었던 제헌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이루고 국가를 환골탈태하는 혁명적 조치인데, 그 의미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시다시피, 입법부·사법부·행정부는 현행 헌법에 그 존립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기존 헌법을 폐기하면 입법부·사법부·행정부 모두 존립 근거를 잃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면, 그 헌법 조항을 토대로 새롭게 국가 권력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도 새로 치러야 할 것이고, 법원과 검찰도 새로운 헌법을 기준으로 다시 구성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헌법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투표로 새 헌법 제정을 승인받으면 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뜻 있는 후보가 "제헌의회 소집"을 공약으로 내건다. "제가 당선되면 국민투표를 통해 제헌의회를 소집해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국가를 완전히 쇄신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한다.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새 헌법 제정 여부를 국민투표로 묻고, 가결되면 헌법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치른다. 국민들이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할 정도의 분위기라면, 제헌의회 선거에서도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 다수 당선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선거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되면, 그곳에서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해 한층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부친다. 국민투표에서 새 헌법이 승인되면 기존 헌법은 효력을 상실하고, 입법부·사법부·행정부도 존립 근거를 잃게 된다. 이후 새로운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를 다시 치르고, 법원과 검찰도 새로운 헌법을 기준으로 전면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을 배신하고 기득권의 이익에만 복무했던 썩은 엘리트층을 일소한다.
그렇다. 베네수엘라의 민중들은 평화적인 선거와 국민투표를 통해 혁명을 수행한 것이다.
국민투표를 통해서 제헌의회 소집을 승인받은 후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통해 131명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제헌의회 의원 중 반대파측 의원은 6명밖에 안될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제헌의회를 통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 불릴만한 ”볼리바리안 헌법“을 만들게 된다. 대통령 소환제를 포함한 수많은 권리를 국민에게 부여하는 이 헌법을 통해 베네수엘라는 이전의 제4공화국 틀을 벗어던지고 국명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꾼 제5공화국으로 들어서게 된다.
새로운 헌법을 만든 후, 이 헌법에 의거해서 2000년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주지사 선거 등 모든 선거를 한꺼번에 새로 치렀으며, 사법부도 새로 구성을 하게 되었다. 차베스가 이끄는 진보개혁 진영에서 모든 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고 차베스는 다시 임기 6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원의 압도적 과반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제헌의회 전술의 진정한 위력이라 할 수 있다.
1999년에 차베스가 대통령이 됐을 때는 이미 한 해 전인 1998년에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상황이었고, 보수세력이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제헌의회를 통해 의회, 행정부 및 사법부 등의 국가기구를 환골탈태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1998년에 형성된 보수적인 의회가 사사건건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고 결국 혁명은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차베스는 1970년대의 칠레의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이 보수적 의회에 발목잡혀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결국은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에 의해 실패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차베스는 선거에 참여하면서 지속적으로 제헌의회 전술을 강하게 주장해왔고 대선에 당선된 후에 실제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제헌의회 전술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선거를 통해서 판을 새로 짠 차베스는 헌법에 근거한 새로운 개혁법안들을 준비했다. 그러나 개혁작업들은 지지부진했다. 그 이유는 MVR 결성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MVR은 1999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히 결성된 정당이었으며, 차베스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누구나 MVR 로 받아들였다. 그러다보니 MVR 내에는 혁명세력도 있지만 기회주의 세력도 적지 않게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제헌의회 헌법 제정과정이나 개혁적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차베스는 결단을 내리고 2001년 11월 10일 비상대권(헌법에서 보장한 대통령의 권한으로 의회의 승인하에 1년동안 대통령이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사용해서 49개의 개혁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지지부진한 개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법안에는 토지에 관한 법률, 어업에 관한 법률, 탄화수소에 관한 법률(석유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는 법률), 소액금융에 관한 법률, 협동조합에 관한 법률 등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자치권력을 강화하는 혁명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MVR 내의 기회주의 세력들은 차베스 진영을 뛰쳐나가서 반대파에 합류하게 됐다. 또한, 차베스는 PDVSA(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의 이사회에서 기존의 타락한 이사들을 한꺼번에 해임시켜버렸다. 이로써 국가의 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로 치면 삼성과 현대를 합친 정도라고 할까) PDVSA가 진정한 국민의 소유가 될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미국 석유기업과 베네수엘라의 과두지배세력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당했다.
그들은 곧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워싱톤의 미제국주의자들과의 공모하에 차베스를 몰아낼 군부 쿠데타가 2002년 4월 11일에 일어났다. 그러나, 군부내의 혁명세력과 국민들이 일심단결해서 쿠데타 세력을 대통령궁에서 몰아내고 섬에 갇혀있던 차베스를 구출해왔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48시간만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국민들이 총칼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반동 세력들이 베네수엘라에서 주인행세하도록 놔두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반혁명세력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본가들과 결탁한 CTV(베네수엘라 노동자 연맹)가 차베스 퇴진을 내걸고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였다. CTV는 이전부터 보수정당인 AD당과 협력하며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받아들이는데 들러리나 서는 어용노조였다. 특히 PDVSA(국영석유회사) 노조가 주축이 되어서 진행된 이 파업은 2달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차베스는 파업에 적극가담한 PDVSA 직원 18000명을 해고시킴으로써 CTV를 무력화시켰다. 노조안팎의 진보적인 인사들은 썩을대로 썩은 CTV의 대안으로 민주노조인 UNT를 결성했다.
우고 차베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창 우리가 ‘석유 테러’라 불렀던 석유파업이 있을 때, 베네수엘라의 기득권층과 그들의 국제 동맹세력(미 제국주의)이 석유 정제소들을 파괴하고, 수백만 리터의 우유를 버리고, 가축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사회 붕괴, 혼란 등을 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방면으로 엄청난 노력을 했음에도, 석유도 없고 천연가스도 없고 음식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피델(카스트로)이 우리에게 콩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주면서 전화로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갚아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다른 물품들은 브라질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콜롬비아로부터 우유, 고기, 석유들을 구입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몇 리터의 연료를 사기위해 사흘 나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힘든 어느 날 오후에 나는 몇몇 동지들에게 저 산골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산골마을로 갔습니다. 거리는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쌀, 바나나 등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근처를 다닐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강한 인상의 흑인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면서 “차베스, 이리 와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와 다툰 것은 아닙니다. “차베스, 이리 와봐요. 나를 따라와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와보면 좋겠어요.” 우리가 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장작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쌀, 감자, 파초 등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나의 눈을 지그시 보더니 양복저고리를 잡고 말했습니다.
“차베스, 내 집에는 의자가 남아있지 않아요. 당신이 보고 있는 저 장작이 침대 다리에요. 우리는 가구, 지붕을 뜯어서 불을 피울 겁니다. 우리는 문도 떼어낼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요리를 할 거에요. 하지만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차베스.”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인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물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인민들의 정수는 무엇인가요?” 그들은 전사들입니다. 군대입니다. 예전에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는 전투 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 모든 인민들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인민들은 군대이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스페인에 맞서 그들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한 인민들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볼리바르와 같은 꿈,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꿈 말입니다. 돈키호테 같은 볼리바르는 외쳤습니다. “모든 라틴 아메리카를 통합하자...예전에 스페인 땅이었던 아메리카를!!” 그때 그는 군대를 이끌고 포토 시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야쿠초에서 수크레는 제국주의자들을 쳐부수고 아르헨티나, 리오 델 플라타, 칠레, 아르티가스, 파나마를 통합했습니다. 그는 완전한 연합 해방군을 창설했고,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해방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우리의 의지력은 시험받고 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강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당신이 쿠바 인민들을 안다면 당신은 이미 베네수엘라 인민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볼리바르가 말했듯이 예전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든 아메리카는 우리의 조국이며, 아메리카의 모든 인민들은 모두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미제국주의와 반혁명 세력의 공세에 대처하는 과정 속에서 조직되고 발전한 자발적 인민조직들은 그 폭과 깊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차원에서 주변 이웃들에게 볼리바리안 헌법에 대해서 교육하고 함께 협동조합을 구성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차베스 정부는 2003년 4월에 매우 중요한 일련의 ”미(Mission)“들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빈민가에서 병원을 개설해서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문맹을 퇴치하고,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중등 및 고등 교육 및 대학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시중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생필품을 제공했다. 각 미션들은 대중들로부터 열렬하게 환영받았으며 혁명 과정에 새로운 동조자들을 얻었다. 이런 미션들이 가능했던 것은 국영석유회사 PDVSA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 거기서 나오는 재원을 국민들을 위해 위해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션들에 대해 차베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피델 카스트로 의장에게 문맹퇴치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의 대화가 생각나는군요. 이 계획은 초기에 작은 규모로 시작했습니다.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스 데 라 시에라에서 개최되었던 이베로-아메리카국가 정상회담에서 돌아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여러 아이디어를 궁리했었죠. 우리가 세운 구상은 작은 규모였기에 때문에 피델은 쿠바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더군요. 나도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했었죠.
쿠바의 한 동지가 내게 들려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피델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자 들어보게. 이 계획을 실시하자면 얼마나 걸릴까? 이 교재 100만 질을 인쇄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100만 질이라니요? 10만이 아니라요?” “100만이네. 얼마나 걸릴까?” 그러자 그 여성 동지는 “아마도 6개월은 있어야 될 겁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피델이 “6개월이라고? 지금 제정신인가?”라고 대답했다는군요. 그 동지는 내게 이러더군요. “피델 의장이 나보고 미쳤다지만, 정작 제정신이 아닌 건 정작 당신과 피델이에요. 당신들 둘은 온통 경쟁하듯 이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러나 피델이 말한 이 계획은 모두 성취되었고 책은 우리에게 모두 보내져 지금은 우리 수중에 있답니다. 이 문맹퇴치 미션이 끝난 뒤에도 미션 로빈슨과 미션 리바스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쿠바의 지원과 함께 이러한 미션들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몬테레이에서 있었던 미주정상회담OAS에서 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은 한심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누구 하나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의에 불참한 쿠바를 공격하는 데에는 모두 열을 올리더군요.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쿠바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해에 우리는 베네수엘라에서 가까스로 불평들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쿠바의 지원과 쿠바와 베네수엘라 양국 인민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행하고 있는 미션들은 피델과 내가 2001년에 체결한 협력 협정과 우리들이 쏟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성과물들을 보고 있는 것이죠.
베네수엘라에서 능숙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사람들은 많아야 연간 15000명 정도 생깁니다. 2003년에 6개월간 우리는 100만 명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 한 해만에 15000명에서 10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불멸의 존재인 체 게바라가 늘 말해온 것처럼 양질의 교육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 과정들을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주시하고 평가하고 촉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나는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도 없는 102세의 노인이 7주 동안에 글을 배우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85세의 할머니도 보았고요. 아버지가 없는 8살, 10살 그리고 12살 먹은 형제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통령 아저씨,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지금은 글을 배우고 있어요.” 그 아이들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고 정규교육 체계의 보호 아래에 있습니다.
이런 것은 초기의 교육 구상이었고 충만한 자신감으로 미션 수크레를 출범시켰습니다. 우리는 문맹퇴치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는 150만 문맹자들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착안해서 미션 수크레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일요일에 대상자들을 소집해보았습니다. 열풍이 일어난 것처럼 60만 명이 넘는 어쩌면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6년 과정을 마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모아보니 역시 100만 명에 가깝더군요. 우리는 잃어버린 고리를 고안해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피델과 대화중에 우리가 잃어버린 고리를 놓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러자 피델이 이러더군요. “잃어버린 고리라니, 차베스?” “네, 잃어버린 고리란 제2의 교육을 받게 됐는데도 마저 끝마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우리가 그들을 파악해보니 거의 70만 명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각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미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전 인구의 60퍼센트가 배우고 있는 중이죠.
카터 전 미 대통령이 최근 방문해서 카라카스 시의 지역 지도인사를 만났을 때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카터는 나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TV 기자회견에서 재차 발언해서 과두지배 세력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지역 지도자들과의 만남은 내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만남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그 지역 모임에서 만난 한 사람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20만 명의 주민들이 지금까지 의사를 구경도 못했다는 말을 카터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쿠바 의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에 대해 말했지요.
거의 40년 동안 그 지역의 20만 명이 넘는 주민들에게 의사는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응급치료를 기다리다 죽기도 했고, 임산부는 마룻바닥에서 출산을 하고 아이들은 천식과 설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사가 있습니다. 이제 한 시간 내에 의사에게 신속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의사들이 약품도 비치하고 있어서 더 이상 약을 사지 않아도 됩니다. 카터는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카터에게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춤추고 술 한 잔 할 시간이 일요일밖에 없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죠. 왜냐고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일 5시 이후에는 학습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민들이 공부하고 글을 배우고 학교 시험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피델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자는 나에게 “당신 제정신입니까? 한 해 동안 이 모든 미션들을 시작한다니요?” 지금 물론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로 모든 미션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쿠바의 놀라운 지원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내가 쿠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화가 나서 길길이 뛰겠지만 상관없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세계포럼에서 연설을 하든지 간에 쿠바에 대한 감사를 공식적으로 상기시키고 부각시킬 것이며 이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세력들은 보수반동 쿠데타와 총파업, 이렇게 두 번의 큰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남은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로 ‘볼리바리안 헌법’에서 국민들에게 보장한 대통령 소환투표다. 차베스 진영에서 만든 민주적인 헌법을 보수반동세력들이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반대파들은 대통령 소환투표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가짜 서명으로 반려되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요건을 맞춘 반대파는(가까스로 요건을 맞춘 서명 조차도 불법으로 점철된 상황이었음) 2004년 8월 15일의 역사적인 소환투표일을 앞두고 결전의 날을 준비해갔다.
차베스는 소환투표에 대응하기 위해서 대중들이 스스로 조직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하여 조직된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과정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터와 삶터를 넘나들며 소환투표에 반대할 것을 선전하고, 사람들을 조직해 들어갔다. 혁명과정에는 동조하지만 그때까지 소극적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 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수천 명의 무명용사들이 각각 모래 한 알로써 기여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2004년 8월 15일의 역사적 소환투표는 200만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차베스의 소환이 부결되는 성공을 낳게 되었다. 잇다른 반혁명세력의 공세를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돌파한 베네수엘라는 앞에서 언급한 미션들을 포함한 다양한 개혁조치들을 실시했다. 그리고 차베스는 2005년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서 ‘21세가 사회주의’로 나아가자고 선언함으로써 베네수엘라 혁명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 200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63%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다시 당선된 차베스는 단결된 인민들과 함께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 즉 ‘21세기 사회주의’를 강화해 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베네수엘라의 혁명과정인 ‘볼리바리안 혁명(Bolivarian Revolution)’은 스페인에 맞서서 남미를 해방시키고 남미의 통합을 시도했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의 혁명을 시몬 볼리바르를 따르는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이름지은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스페인은 물러갔지만 미제국주의는 지금도 남미를 자기의 뒷마당 쯤으로 여기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남미의 민중들을 수탈하고 억압하고 있다. 차베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남미국가들이 미제국주의에 맞서서 단결해야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다. ‘볼리바리안 혁명’ 이라는 이름에는 그와 같은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차베스는 당선 이후 지속적으로 반미 외교를 펼쳤다. 취임 후 미국의 반대에도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을 방문했고, 부시 정권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란을 방문해서 이란 핵개발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했으며 IAEA 총회에서 이란에 대한 안보리 결의안 회부에 대해 베네수엘라 대표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유엔정상회의에서는 강력한 반미연설로 참석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바로 이 장소에 어제 그 악마가 다녀갔습니다. 제가 서있는 이 연단에는 아직까지도 유황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어제, 제가 서있는 이 자리에 제가 악마라고 지칭한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께서 마치 자신이 전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연설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의사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 2006년 9월 20일 우고 차베스 유엔 연설 中-
미국 시장에 경도된 베네수엘라 석유 판로를 다변화하고 쿠바,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으며, 특히 쿠바와는 혈명의 관계라 할만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역내 자유무역을 통해서 남미시장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FTAA(미주자유무역협정) 기획에 대항해서 남미의 진보적인 국가들을 모아서 ALBA (미주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를 추진했다. 쿠바는 베네수엘라에 우수한 의료진을 파견하고 베네수엘라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석유를 쿠바에 제공하는 방식. 단순히 돈벌이 하자는 식의 무역이 아닌 국가 상호간에 도움이 되는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차베스가 추진하는 중남미공동체 ALBA의 모습이다. ALBA를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동맹에 참여하는 국가들에게는 시장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조건으로 석유를 제공한 것이다.
2007년 12월에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중남미 국가들이 모여서 ‘남미은행’을 창설했다. 이 은행은 명백하게 IMF를 겨냥해서 설립된 것이다. 미국이 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IMF는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미국이 원하는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바꿔서 경제적 침탈을 하기 쉽도록 기초공사(?)를 했다. 중남미의 국가들은 IMF를 앞세운 이러한 미국의 경제침공에 1980년대를 파탄의 시절로 보냈다. 남미은행은 IMF와는 다르게 외환 위기를 겪는 나라에 가혹한 조건 없이 금융지원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IMF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된다.
미국의 미디어를 동원한 흑색선전에 맞서, 남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방송국인 텔레수르를 만들어서 전세계에 방송을 시작했다. 이 외에도 미제국주의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해 중남미 국가들의 공동방위군 창설을 제안해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으로서는 차베스가 그야말로 눈에 가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반미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함께 앞장서고 있는 쿠바와 피델 카스트로 의장에 대해서 차베스는 다음과 혁명적 동지애를 표현했다.
❝이러한 관계는 꽤 오래 전인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역사가 나를 사하리라History Will Absolve Me 』『Face to Face with Fidel Castro』 프레이 베토의 『Fidel and Religion』, 지아니 미냐의 『An Encounter with Fidel』을 읽었습니다. 피델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고 항상 이곳을 나오기만 하면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긴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를 만나보길 고대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쿠바에서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1994년 12월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곳에 갔습니다. 비행기 착륙 후에 보니 피델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그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정기항공 편을 이용했음에도 비행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시 우리는 포옹을 나눴는데 이미 말했듯이 베네수엘라의 과두세력은 신문 1면에 그 사진을 실었습니다. 신문 1면에 등장해 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신문 전면에 실리다니요? 악의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컬러 사진이 실렸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기사들도 실렸더군요. ‘피델이 차베스를 먹어 치우다’ ‘차베스 피델에게 복종하다’ ‘악의 축’ 따위의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주문과도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지만 우리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피델 카스트로와 독재에 대한 공포를 주입하기 위해 악마적이고 사악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모두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과두세력은 내가 쿠바에 체류하는 이틀간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선전을 쏟아냈습니다. 내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 일부를 방송에 내보내고 몇 명의 전문가들을 불러와 논평을 해댔습니다. 이틀 후에 베네수엘라로 돌아왔습니다. 12월이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어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마이퀘티아에 도착해서 동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카라카스 시내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변호사 친구가 돈을 빌려주어 얻은 얼마 안 되는 가구와 작은 회의실이 있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자는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어둑해진 카라카스 시내를 가게 되었습니다. 피델과 내가 나눈 포옹에 대해 사람들에게 쏟아진 악선전을 생각해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시내 중심부에서 한 취객이 손에 술병을 들고 지그재그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히 취해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 우리는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피하려고 길 반대쪽으로 가려했지만 그 사람이 술병을 든 채 갈지자로 걷는지라 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요. “당신 차베스처럼 생겼는데.”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차베스네. 괜찮은가?”하고 손을 뻗쳤는데 몇 마디 중얼거리면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요. 결코 그 사람의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차베스, 피델 만세!”
그건 과두세력의 어리석음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피델 만세! 피델과 나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내 개인적, 정치적 명성에 흠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이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자들은 1959년(쿠바혁명이 승리한 직후)에 피델이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가장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최근 몇 십년간 내내 우리 인민들은 피델을 존경해왔습니다. 인민들은 그를 지지하고 그를 사랑합니다.
1989년에 난 카를로스 페레즈 안드레스 대통령의 취임식에 피델이 참석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라플로레스 궁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행사를 지켜봤습니다. 군사 퍼레이드가 있어 세계적 인사들이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의회의 중간계급, 정객, 공무원, 심지어 보수정당인 AD당 지지자까지도 말이죠. 그들은 모두 피델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내릴 때까지 피델이 나타나지 않자 의회에는 실망하는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앉아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는 피델을 가까이서 보고자 했습니다. 피델은 그 퍼레이드에 결국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내 생각엔 경호상의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선거기간 동안 그들은 다시 1994년도의 비디오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베네수엘라 군에 피델과 내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디오를 유포하기 위해 병영마다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일부 군사심리학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제기랄, 당장 이 짓을 그만두시오. 역효과만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비디오가 피델과 차베스에 대한 젊은 군인들의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당장 그만두시오.”
내가 대통령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치졸한 짓을 계속했습니다. 1999년 1월 말 취임하기 며칠 전에 여행을 가서 아바나에 잠시 체류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 브라질리아, 멕시코시티를 거친 다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드리드에 있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우리는 파리로 이동 후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떠나 베네수엘라로 잠시 간 뒤 아바나로 가고 마지막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가깝기 때문이죠. 취임 전에 방문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보좌관이 오더니 워싱턴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더군요. 마드리드에서 경제인들과 오찬을 함께하고 있던 중이라 나는 물었습니다. “워싱턴에서 전화가?” “네, 피터 로메로입니다.” 로메로는 이베로-아메리카 사무국의 차관이었습니다. 그는 12월만 해도 클린턴 대통령이 보낸 워싱턴 방문 초청장을 가지고 베네수엘라에 왔었기 때문에 나는 즉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내가 비자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내게 비자를 내준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거절당하곤 했죠.
내가 수화기를 들자 얘기하더군요. “대통령 각하, 우리가 듣기로 아바나를 방문하신다고요.” “그렇소, 며칠 후에 아바나에 갈 거요.” 그러자 그 즉시 말하더군요. “음... 우리는 아바나에 방문하지 말라는 권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뭐라고?” “그렇습니다. 만일 아바나에 방문한다면 클린턴 대통령과 접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얘기했습니다. “잘 들으시오, 로메오. 당신은 전혀 잘못 짚은 거요. 당신은 독립국가의 대통령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소. 이 문제를 다시는 꺼내지 마시오.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면 보좌관에게 연락하시오.”
다음날, 파리에서 언론인 몇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공개했습니다. 그날 밤 호텔에서 로메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통화를 나눴습니다. “대통령 각하. 제 말을 오해하신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접견을 원하고 있습니다.” “뭐, 좋소. 클린턴 대통령이 날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쨌든 난 아바나에 갈 것이고,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소. 누구도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선 안 돼오. 당신 아니라 누가 말하든 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나는 아바나를 방문했고 이틀 뒤에 백악관에서 클린턴을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에는 결국 반대파에 가담하는 루이스 미낄레나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연설이나 TV,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주 피델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미주정상회담이 있던 몬테레이에서 부시가 그의 개막연설 중 피델이 불참한 상황에서 쿠바와 피델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내 연설 차례가 오자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정상회담의 주제가 균등한 성장임에도 2003년 베네수엘라에서 경제 성장은 없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경제성장은 쿠데타와 석유업계의 사보타지로 인해 적어도 10퍼센트는 하락했습니다. 경제 후퇴였습니다. 그럼에도 쿠바의 헤아릴 수도 없는 지원으로 베네수엘라는, 예를 들면 미션 로빈슨 같은 것들을 통해 사회복지, 평등, 사회정의 확대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부시가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직접 그를 보진 못했지만 나중에 부시가 얼굴을 붉힌 채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있더란 말을 들었습니다. 난 쿠바에 대해 3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쿠바 인민과 피델이 보내준 지원에 대해서 감사를 표명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전혀 후회가 없지만 다른 몇 가지 점에서는 용서를 표명합니다.
몬테레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카다피와 전화 통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왜 쿠바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전 국가가 참석하는 회담에 참가하지 않았냐고 묻더군요. “아! 그건, 미국이 쿠바를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우고, 잘 듣게. 우리 아프리카의 예를 들어보게. 영국이 유럽연합 회담에 짐바브웨 무가베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을 막은 적이 있네. 그때 우리는 무가베가 갈 수 없다면 우리 누구도 참석할 수 없다고 했네.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네.”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고 교묘하게 조종하는지 한 번 보세요.
우리는 나름대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피델의 우정에 경의를 표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합니다. 그에게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 국민을 대신해서 사의를 표합니다. 우리와 협력하기로 한 피델의 결정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지도자와 자국의 인민들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인민들과의 사이에 이러한 전례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의 협력은 영원하고 굳건하며 갈수록 증대되고 있습니다.❞
차베스 사망 후 대통령에 당선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차베스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 베네수엘라의 혁명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마두로 정권이 정책적 실수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그렇게 외신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마두로와 베네수엘라 집권당이 악마라면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1992년 때처럼 진작 들고 일어났어야 하는데. 여전히 그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고(저들은 부정선거라고 흑색선전을 퍼붓는다), 베네수엘라의 기층 민중들도 미국의 경제 봉쇄와 제재와 군사적 위협을 인내심으로 감내하고 있다. 왜 그럴까.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일련의 혁명 과정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이 혁명 과정을 뒤엎기 위해 미제국주의와 베네수엘라 기득권층이 내세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며, 노벨평화상을 트럼프에게 바치고 싶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노벨상의 서구 중심성과 편향성을 비판하며 수상을 거부한 장 폴 샤르트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