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아재 우당탕탕 그리스 여행기 2 (스크롤 주의!)
빅머니

Lv.1 빅머니 (61.♡.186.175)

2025년 11월 3일 PM 07:01 · 수정됨(11. 07. 10:16)

조회 1,063 공감 0

1편(https://damoang.net/free/5213782)에 이어 갑니다.


그리스 도착 시간이 12시 반쯤이었습니다. 입국 수속을 이미 덴마크에서 한 상태라 짐만 찾으면 되었고, 짐을 찾자 마자 바로 아테네 시내로 가기 위해 버스표를 끊었습니다.

공항에서 아테네 시내로 가는 방법은 버스와 지하철 두 가지입니다. 버스는 5.5유로에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고, 지하철은 9유로에 50분 정도 걸립니다. 첫 날이니 지상 구경을 하자 싶어서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버스는 X95 버스로 티켓 파는 곳이 공항 바깥쪽에 있는데 따로 안내판이 없다 보니 좀 찾기 쉽지 않습니다. 이거 보면 우리나라 인천공항은 정말 친절한 겁니다.

아테네 공항은 여러모로 솔직히 좀 많이 불편합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국내선과 국제선이 한 공항에 있다 보니 체크인 카운터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반면 전광판에 표시는 코딱지만 해서 체크인 카운터 찾는 것만 해도 하세월입니다.

어쨌든 버스표를 사야 했기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매표소 위치가 나오더군요. 가서 바로 X95 버스표를 구매했습니다.

때맞춰 버스도 바로 왔기에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스 버스는 우리나라와 좀 태깅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탈 때와 내릴 때 모두 찍는데, 그리스는 탈 때만 찍습니다.

특이한 점은 버스 티켓이 종이인데 내부에 무슨 마그네틱이 들어 있는지 버스표 인식기에 탭할 때 시간이 기록됩니다. 그때부터 시간 카운트에 들어가는 거죠. X95 버스표의 경우 탭하는 순간부터 90분간 유효합니다. 그 시간 지나면 무효표가 되는 거죠.

X95는 굴절 버스여서 버스 자체는 길지만 좌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처럼 24인치 이상의 캐리어를 들고 타는 사람은 앉아 가기 매우 곤란합니다. 표현하자면 우리 시내 버스 뒤에 2명씩 앉는 자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 앉아서 캐리어를 쥐고 있는다? 통로를 당연히 막겠죠.

그래서 캐리어 큰 거 든 사람들은 우리나라 시내버스 중 보면 요즘 1열 좌석 없애고 만든 입석 부분 같은 곳에서 캐리어 잡고 서서 가야 갑니다.

물론 저는 중년 아저씨라 안면 몰수하고 그 입석 부분에 캐리어를 둔 뒤 자리에 앉아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고 탔습니다.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은 없어서 X95 버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을 보여드리자면 저 빨간 단말기 바로 뒤에 앉아서 캐리어는 앞에 두고 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안면 몰수까지는 아니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나서 느낀 점은 ‘음… 다음부터는 그냥 지하철 타자.’였습니다. 일단 지하철보다 느린 것은 둘째 치고, 코너링이 많다 보니 캐리어 붙잡고 있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안면 두꺼운 몇몇 사람은 입석 자리에 캐리어를 눕혀 놓고 앉아 있던데, 눕혀 놓은 캐리어가 코너링할 때마다 주르륵 미끄러져 다닐 정도였습니다. 돈이 좀 비싸도 지하철이 차라리 편합니다. 물론 지하철이라고 앉아 가기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좌석이 몇 개 없어서 서서 가야 합니다. 그래도 캐리어 쥐고 있느라 손이 아픈 것보다는 낫겠죠.


그렇게 해서 도착한 신타그마 광장! 신타그마가 그리스어로 헌법이라는 뜻인데, 19세기 그리스 왕국의 헌법이 반포된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기에는 무명 용사 기념비가 있고, 그 앞의 근위병들이 1시간마다 교대식을 합니다. 사실 저는 시간이 안 맞아 교대식은 못 봤습니다.

일단 광장 근처에 잡은 호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집에서부터 시작하면 거의 24시간 걸려 온 터라 많이 피곤했지만 벌써 오후 2시가 넘은 지라 빨리 움직여야 했습니다. 침대에 베드버그 흔적이 없는지 확인하고 혹시나 해서 늘 뿌리는 비오킬을 열심히 뿌린 뒤 바로 호텔을 나섰습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까지는 지하철로 한 정거장, 버스로는 두 정거장 거리입니다. 정거장까지 가는 시간, 대기 시간 포함하면 대충 20분 잡아야 하는 거리죠. 걸어가도 20분 거리라 이 참에 동네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사부작사부작 걸었습니다.

아테네 시내는 다른 유럽 도시들과 비교하면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테네가 고대 시절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이후로는 제국의 변방이었기에 그냥 지방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독립 이후에나 수도로써 급격한 발전을 하다 보니 현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유적을 제외한 일반 건물들에서는 역사를 느끼기가 힘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테네는 그래피티의 도시라 할 만큼 그래피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지하철 열차 옆면에도 그래피티를 그릴 정도니 할 말 다했죠. 이게 좀 과하다 보니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게다가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가려고 하면 중간에 오모니아 역을 지나야 하는데, 이 오모니아 역 주변이 요즘은 좀 나아졌다지만 한때 우범 지역이었습니다. 요즘에야 낮에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지만 밤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낮에만 다녀서 못 봤지만 약쟁이들이 밤에 종종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숙자는 낮에도 꽤 많이 보였습니다.


마침내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앞에 펼쳐진 넓은 정원을 지나면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하는 박물관이 보입니다. 정면 입구의 기둥은 이오니아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여기서 팁 하나! 그리스 로마 시대 기둥은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이렇게 세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도리아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이오니아는 양머리 장식이 있으며, 코린트는 가장 화려해서 아칸서스 잎모양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심심한 도리아, 양머리 이오니아, 화려한 코린트 이렇게 외우시면 아는 척하실 수 있습니다.


입구에 X레이 검사기가 있어서 가방은 잠시 벗어서 검사 받아야 합니다. 검사를 받고 나면 티켓을 구입할 수 있으며 박물관 입장료는 12유로입니다. 박물관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대별로 전시가 되어 있으니 왼쪽부터 시작해 천천히 방을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 보는 데 최소 2시간은 걸립니다.

중요한 것은 그냥 가서 보면 이게 뭐야 하기 딱 좋으니 미리 공부를 하고 가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에게 문명 시대, 암흑기,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로 나뉩니다. 에게 문명은 다시 미노아, 미케네 문명으로 나뉩니다. 미노아 문명은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섬에서 탄생했습니다. 이들이 소아시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들의 유골에서 채취한 DNA도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본토와 아나톨리아 지역의 DNA가 섞여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넘어갔으니 자연스럽게 당시 유행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스타일이 많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양식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은 이집트가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짓고 있을 정도로 국력이 지중해 최강자일 때라 주변 국가들이 문화적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각 양식들을 보면 이집트 양식과 유사성이 매우 많이 나타납니다.

다만 이런 유물들은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는 별로 없습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도 선사 시대 유물이나 미노아 문명 시절의 유물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케네 문명의 유물이 훨씬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테네 박물관은 마치 ‘미케네 때부터가 진짜 우리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중에 크레타편에서 쓰겠지만, 크레타 헤라클레온 박물관에 있는 미노아 문명 시대의 유물들은 확실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선사 시대 유물들을 보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여성 점토상들이 많습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조각인 만큼 이들 지역 역시 고대 유럽 전체에 퍼져 있던 농경 부족의 여신 숭배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주둥이가 특이한 모습의 도기가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 도기류의 목적은 소스를 붓는 용도라고 하는데, 일종의 주전자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겠죠. 물론 진짜 신화 속의 아가멤논은 아닐 것이고, 그냥 이름만 그렇습니다. 이것만 보면 뭐 저게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같이 전시된 다른 황금 유물들을 보면 이 시절의 금 세공술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가멤논 마스크 아래 사진은 바로 옆에 전시된 황금 유물들인데 굉장히 정교하죠.

그 외에 청동기 시절 무기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십점에 달하는 청동검과 창이 전시되어 있었고, 청동검을 보면 세형 청동검 양식이 주류를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각상들이나 그림이 그려진 도기류는 당연히 그리스 신화를 많이 다루고 있고, 한 두 점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거론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냥 보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박물관에 가기 전에는 꼭 그리스 신화와 고대 중근동 문명사를 한 번이라도 다시 읽어보고 가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는 여러 신화가 뒤섞여 만들어진 짬뽕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스인들이 인도유럽어족인 만큼 아리안족의 원시 신앙을 기반으로 합니다. 아리안족의 원시 신앙은 데바 신족과 아후라 신족으로 나뉘는데 데바 신족이 선신, 아후라 신족이 악신인 쪽은 인도로, 아후라 신족이 선신, 데바 신족이 악신인 쪽은 이란으로 갔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이 중 데바 신족이 선신인 쪽의 영향을 받은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아카이아인의 신화입니다.

참고로 데바(여성형은 디바)-데우스-제우스-유피테르(로마)-드야우스(힌두교) 모두 데바를 어원으로 두고 있죠.

아리안족의 원시 신앙은 구조를 보면 창조신이 있고, 창조신이 세상을 만든 후에 중간신들이 세상을 관리합니다. 창조신은 대체로 세상을 만든 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뒤로 물러나기 때문에 최고신은 대부분 중간신들이 차지합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에서 브라흐마는 세상을 창조했지만 인도에서 가장 인기 없는 신입니다. 세상에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최초의 혼돈신 카오스가 가이아, 에레보스, 닉스, 타르타로스, 에로스를 낳았다고 하고, 가이아가 다시 우라노스, 폰토스(1세대 바다의 신) 등 자녀를 낳았으며, 우라노스-가이아는 오케아노스(2세대 바다의 신), 테티스, 코이오스, 크로노스, 레아 등을 낳았습니다. 크로노스가 레아와 부부가 되어 그리스 신화의 주요 신격인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하데스, 헤스티아, 데메테르 등을 낳았고 이 3세대 신들이 기존 신들의 신격을 이어받아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스 신화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대충 이 정도 내용은 다 아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1세대와 2세대 신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고 3세대 신들이 올림포스 12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1차적으로 아리안족이 창조신이 세상을 만든 뒤 중간신들이 실질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무래도 창조신은 세상의 원리만 창조했을 뿐, 실제 생활에는 영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들에게 신앙이 쏠린 결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대상을 다스리는 신격이 계속 바뀌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다의 신만 해도 폰토스→오케아노스(ocean의 어원입니다.)→포세이돈으로 이어지고, 태양의 신도 휘페리온→헬리오스→아폴론으로 바뀝니다. 이는 원래 존재하던 지역 신들이 같은 신격을 가진 신흥 세력의 신들로 대체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티탄족은 아카이아인이 침입하기 전, 그러니까 기원전 15세기 이전의 에게해 지역 원주민들의 신이었습니다. 올림포스 신들이 티탄족과 싸워 그들을 지하(타르타소스)에 가뒀다는 것은 침략자들이 원주민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신앙을 파괴했음을 상징하는 셈이죠.

그럼에도 가이아가 심심찮게 튀어나와 각종 괴물을 동원해 제우스에게 반격을 가했다는 것은 부계 중심이자 천신을 믿는 아리안 신앙에 불만을 품은 기존 농경 민족의 대지모신 숭배 사상이 수차례 반격했다는 것이고, 하지만 결국 패배해 올림포스 신앙 체계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포세이돈과 제우스의 관계도 보면 포세이돈이 제우스보다 형이라는 점, 그리고 바다의 신인데도 지진과 연관이 있다는 점 등에서 원래 최고신이 포세이돈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당초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이 아니라 땅의 신으로 대지모신의 부계화 과정에서 나타난 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제우스는 태어난 곳이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크레타섬입니다. 미노아 문명의 탄생지죠. 미노아 문명이 그 영향력을 그리스 본토에 투사하면서 최고신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미케네 문명 시절 초기에는 한때 포세이돈이 최고신이었지만, 아카이아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최고신이 땅의 신에서 하늘의 신으로 바뀐 것이죠. 그 과정에서 포세이돈의 영향력을 고려해 땅의 신에서 바다의 신으로 위치가 이동했고요.

외부 세력의 신이 침투한 것은 제우스가 끝은 아닙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도 외부 세력의 신이었습니다. 아폴론은 트로이의 신이었고, 트로이가 강성하던 시기에 그리스로 유입되었습니다. 일리아드에서 아폴론이 괜히 트로이 편을 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트로이 전쟁 중 아폴론뿐만 아니라 아폴론의 남매인 아르테미스도 트로이 편을 들었는데, 아르테미스 역시 중근동의 강력한 신이었습니다. 지금도 튀르키예 가면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에 많이 가죠.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쌍둥이 신이라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신화에 편입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아마 그리스가 본격적으로 해양 민족으로 발돋움하면서 중근동 지역과 교류했고, 이 과정에서 신화를 흡수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아프로디테도 신화에서 그 탄생 과정을 보면 바다 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 본토가 아닌, 바다 건너 세력에서 시작되었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아프로디테의 근원은 키프로스였다고 추정됩니다. 키프로스는 지도를 보면 튀르키예 남부 해역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보다는 트로이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러니 황금사과 사건이 아니었어도 아프로디테가 트로이 편을 드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신화 시대와 영웅 시대로 나뉩니다. 신화 시대는 세계 창조, 티탄족의 시대, 올림포스 신들의 부상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영웅 시대는 헤라클레스를 비롯해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고, 트로이 전쟁으로 마칩니다. 트로이 전쟁은 제우스가 세상에 너무 많이 퍼진 신들의 핏줄을 정리하기 위해 벌인 전쟁으로 신의 직계 혈족들(반신급 영웅들)이 대거 사망함으로써 그리스 신화가 끝나게 됩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는 영웅시대의 장송곡인 셈입니다.

이후 역사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리스인들은 이 영웅들의 핏줄이 자기에게 이어졌다고 냅다 주장하고, 그 과정에서 제우스는 갈수록 난봉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조상이 제우스와 이어지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우스가 자기네 조상 할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주장하니 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제우스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올림포스 12신은 공히 다 당한 일입니다. 당장 로마 제국을 세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안만 해도 아프로디테(로마였으니 베누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율리우스 가문은 트로이 전쟁 때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이울루스의 후손이라고 하며, 아이네이아스는 아프로디테가 인간과 짝을 맺고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이 벌인 짓도 그렇지만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막장 행동들을 많이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들의 막장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암흑기 때 많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11세기경 도리아인이 침공하면서 미케네 문명이 몰락한 이후 그리스는 거의 400년 넘게 암흑기를 맞습니다. 암흑기라 부르는 이유는 도시가 다 박살나고 기록도 별로 없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문명이 붕괴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맞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비극적인 운명은 신들조차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암흑기를 극복한 뒤 고졸기와 고전기를 거치면서 시인들은 운명에 대한 다양한 비극을 쓰기 시작했고, 비극을 보면서 그리스 시민들은 삶을 되돌아보는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다양한 드라마가 쓰여지다 보니 극중 신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신들의 막장 행동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운명적 사건을 쓰려다 보니 해당 사건을 지배하는 신이 등장해야 하고, 주인공이 파멸되려면 해당 사건을 주관하는 신이 막장 짓을 해줘야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시대 그리스인들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이들은 현재 우리가 아는 신화가 시인들이 쓴 창작 스토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한 종교를 막장으로 만든다고 당시 시인들을 엄청나게 비난하곤 했습니다. 원래 그리스 신들은 자연 현상이나 특정 개념을 신격화한 것이고, 아리안 신앙에서 파생된 형태답게 신전에서 제물을 태우는 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전형적인 고대 종교였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는 재미를 추구하는 창작물인 세인트 영맨(만화… 아시죠? 저는 오덕이 아닙니다…), 그리스 종교는 경건한 종교인 기독교라고 이해하셔도 됩니다.

굉장히 길게 신화 관련 이야기를 썼는데, 이와 같은 신화의 흐름을 알고 보지 않으면 그리스 유물들에 왜 저런 신화가 묘사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암흑기 이후 인생의 부조리함을 어떻게든 납득해보려한 그리스인들이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 갔고, 현대인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소비하듯 연극으로 신화를 소비하면서 굿즈 같은 개념으로 예술에도 반영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몇몇 작품을 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유명한 청동상 작품 중 하나인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입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게 번개인지 삼지창인지 알 수 없어 제우스 또는 포세이돈이라고 부릅니다. 저 머리 스타일과 수염 양식은 메소포타미아 양식의 영향을 아주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구글에서 사르곤 대왕 두상이라고 검색해보시면 그 유사성이 너무 뚜렷하게 보입니다. 반면 몸통은 완전히 그리스적입니다. 차렷 자세를 취하는 매우 정적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양식과 달리 그리스는 고전기에 접어들어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조각 양식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 표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디오니소스 조각으로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헤라의 핍박을 받은 신이기도 합니다. 그의 광기는 음주 후 주취를 상징하기도 했고, 고대 디오니소스의 비밀 제의는 꽤나 유명했습니다. 아버지는 제우스이지만 어머니는 인간, 죽었다가 부활함 등과 같이 기독교의 전승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동지 무렵 또는 12월 25일이 생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실 성탄절이 12월 25일이게 된 것은 훗날 태양신 미트라의 날을 성탄절로 바꾼 것이라 이런 우연이 겹친 점도 있지만, 사실 죽음 이후 부활은 고대 종교에서 꽤나 자주 등장하는 시나리오라 디오니소스 비밀 제의가 기독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근동 종교에서 유사하게 반복되는 레퍼토리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죠.

이 작품은 법과 정의의 여신 테미스입니다. 파괴된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었고, 왼손에는 봉헌 그릇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가 아는 법과 정의의 여신과 뭔가 다르죠? 네, 눈을 가리고 있지 않습니다. 눈을 가리고 있는 여신은 유스티티아로 유스티티아는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테미스를 자체적으로 재해석해 받아들인 신입니다. 테미스가 들고 있는 천칭은 별자리 천칭 자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신화 관련 조각은 이쯤에서 끝내고 가장 끝내주는 작품 하나로 고고학 박물관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안티키테라 기계입니다. 톱니바퀴를 이용해 행성의 운동을 계산해주는 고대의 컴퓨터입니다. 그 옆에 복원한 제품도 있는데 기원전에 이런 물건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박물관을 다 돌아보고 나오니 5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이제 슬슬 신타그마 광장 쪽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대로를 따라 걸으면 아테네 학당이 나옵니다.

아테네 학당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로 그리스 신전을 모방해 만든 건물입니다.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어 내부는 못 봤습니다. 입구 계단 앞에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조각이 있고, 건물 양쪽 기둥 위에는 아테네와 아폴론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계속 신타그마 광장을 향해 가면 바로 옆에 성 디오니시오 대성당이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하필 결혼식이 막 끝났는지 신랑 신부와 하객들이 나오고 있더군요. 중간에 난입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참았습니다.

그런데 성당 문 바로 앞에 구걸하는 걸인이 있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와 가장 어두운 시기를 동시에 보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걸어서 신타그마 광장에 돌아온 저는 잠시 무명 용사의 기념비 앞에 서서 묵념을 했습니다. 이 기념비에는 6.25 전쟁 참전도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와 무관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가 저물 시간이라 노을빛이 쓰러진 용사의 양각을 노랗게 물들이며 황혼 너머의 세계로 떠난 이들을 위로하는 듯했습니다.

해가 더 지기 전에 관광을 마쳐야 했던 저는 재빨리 기념비 옆에 있는 국립 정원으로 들어섰습니다. 대충 1시간에 걸쳐 공원과 자페이온을 거쳐 올림픽 경기장,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빙 돌아 나왔는데, 결론은 “괜히 돌았다!”였습니다.

국립정원은 솔직히 별로 볼 거 없습니다. 모로코의 마조렐 공원을 돌았던 기억이 너무 강렬한 탓인지 규모만 컸지 그냥 그랬습니다. 아멜리아 왕비의 퍼걸러도 한 여름이었다면 모를까 가을에 접어든 이 시기에는 덩굴이 다 시든 이후라 휑한 철골 구조물만 남아 있고, 로마 유적지라는 것도 뒷마당 같은 곳에 돌 무더기 몇 개 있어서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올림픽 경기장 가는 길에 있는 곳이니 지나쳐서 나쁠 건 없지만 시간 없는 사람이라면 여길 꼭 와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올림픽 경기장은…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12유로 내라는 소리에 “비싸!”를 외치며 돌아섰습니다. 사실 밖에서도 내부 다 보이거든요. 12유로 내고 안에 들어가 할 거라고는 시상대 위에서 기념사진 찍는 게 전부입니다. 게다가 저는 혼자죠? 혼자서 삼각대에 스마트폰 설치하고 시상대 올라가서 만세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부끄럽겠죠? 네. 많이 부끄럽습니다. 내향인인 저는 차마 그것은 못하겠다 싶어서 돌아섰습니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제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영업 시간이 끝난 다음이라 들어갈 수도 없었죠. 그리고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 올릴 파르테논 편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위에서 다 내려다 보입니다. 보면 다 부서지고 기둥 두어개 남은 게 전부인 곳이라 안에 6유로 내고 들어가면 돈이 무척 아까울 것입니다.

벌써 7시가 되었습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지쳤습니다. 어디서 밥을 먹을까 하다가 호텔 앞에 있는 식당에서 그냥 먹기로 했습니다.

그리스에서 첫 저녁은 무난하게 그릭 샐러드와 돼지고기 수블라키를 시켰습니다.

페타 치즈는 처음 먹어봤는데, 처음에는 그 꼬릿한 냄새가 이상했지만 이게 중독성이 있더군요. 계속 땡깁니다. 특히 같이 시킨 맥주 안주로 예술이었습니다. 샐러드를 다 먹었을 무렵 수블라키가 나왔습니다.

피타빵에 돼지고기를 쏙 빼서 싸 먹으니 “움~! 딜리셔스~!”가 절로 나옵니다. 배가 고파 더 그런 것도 있었겠죠? 샐러드로 이미 배를 많이 채운 뒤라 감튀는 결국 남겼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벌써 9시가 가까이 되어 너무 피곤해 샤워만 하고 바로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하루가 금방이네요. 다음 날 아침 8시 아크로폴리스 입장을 예약해 둔 터라 일찍 움직여야 하기도 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간만에 꿀잠을 잤습니다.

박물관 이야기 하다가 너무 많이 썼네요. 내일은 조금 분량 조절을 해야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댓글 (13)

  • 민탱굴

    민탱굴 Lv.1

    25.11.03 · 221.♡.18.124

    와 정성스러운 글 잘읽었습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글로 읽은 기분이네요. 여행기 1편은 못읽었는데 1편 읽으러 가야겠습니다.
    {emo:damoang-emo-008.gif:120}
  • 빅머니

    빅머니 Lv.1 → 민탱굴 작성자

    25.11.03 · 211.♡.194.206

    감사합니다.
  • 운행이 Lv.1

    25.11.03 · 1.♡.27.139

    그리스 여행 리스트에 있는데 아주 잘봤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 빅머니

    빅머니 Lv.1 → 운행이 작성자

    25.11.03 · 211.♡.194.206

    열심히 연재해보겠습니다.
  • 플린스톤 Lv.1

    25.11.03 · 180.♡.78.74

    글을 정말 잘 읽히게 쓰시네요. 책으로 내주시면 바로 주문하겠습니다!
  • 빅머니

    빅머니 Lv.1 → 플린스톤 작성자

    25.11.03 · 211.♡.194.206

    슬프게도 책 한 권 분량까지는 아닙니다. ㅠㅠ
  • Order66

    Order66 Lv.1

    25.11.03 · 106.♡.11.147

    다음 편도 어서 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ㅠ 정성스런 후기 너무 감사합니다 ㅎㅎ
  • 빅머니

    빅머니 Lv.1 → Order66 작성자

    25.11.03 · 211.♡.194.206

    하루에 한가지 바람돌이 서언물~
  • RubyBlood

    RubyBlood Lv.1

    25.11.03 · 118.♡.6.237

    우와 제가 여행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상세한 글 감사합니다.
    저도 내년에 안식휴가 때 유럽 가고 싶어지네요.
    이미 샹그릴라 뱅기표 예매 했는데 말이죠.
  • 빅머니

    빅머니 Lv.1 → RubyBlood 작성자

    25.11.03 · 175.♡.29.112

    감사합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