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426 (211.♡.154.21)
2026년 5월 19일 PM 05:56
이 글은 밀덕이나, 현대 중동 지역 정치나 역사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사건”에 대한 글입니다. 1980년대 초반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이 이라크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 국내의 원자로를 폭격해서 파괴한 사건이었습니다. “탑건: 매버릭”의 폭격 장면은 이때 이스라엘 공군기들의 기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좋았던 한 때
몇 달 전에 "[뻘글] 이스라엘의 핵 위협 - 공포의 총합”이라는 이스라엘의 핵개발 비화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 이란의 이슬람 혁명 전, 최소 1970년대 초중반까지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큰 동맹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란이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미국이 당시 서방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기였던 F-14를 수출한 유일한 국가가 이란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미국이 F-22를 수출한 격이랄까요?
미국과 이란만 사이가 좋았던 게 아니라, 이란은 이슬람 국가들의 원수인 이스라엘과도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이슬람 국가로서는 예외적으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했고, 중동 전쟁에서도 이란은 이스라엘을 지원했습니다. 팔레비 치하의 이란은 “사바크”라는 비밀 경찰을 이용해 반정부 세력을 탄압했는데, 이 사바크는 CIA의 후원으로 만들어졌고,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웃기는 건 이슬람 혁명 이후에도 이란과 이스라엘은 물밑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는 겁니다. 후세인의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대다수 이슬람 국가들과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원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란을 지원했습니다. 미제 무기로 무장했던 이란으로서는 혁명 이후 미국의 봉쇄로 막혔던 부속품이나 무장의 입수 경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한국도 이 시절 이란에 군수 지원을 했다는 의혹도 있었지만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지원한 것은, 크게는 이란과 이라크가 싸우다가 둘다 망하거나 약해지길 원해서였을 테고, 기존의 협력 관계의 유지 관성도 있었을 테고, 무엇보다 이란보다 이라크가 이스라엘에 대한 임박한 위협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거리만 봐도 이란보다는 이라크가 이스라엘에 더 가깝기도 했습니다.
후세인은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꿈꿔왔고, 프랑스의 기술 지원으로 수도 바그다드 인근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이스라엘 핵 무기 개발도 프랑스가 지원했는데? 프랑스 놈들은 왜 이렇게 전 세계의 핵무장화를 못 도와줘서 안달일까요? 얼마 전엔 우리나라 원자력 잠수함에 연료를 공급하겠다고 나섰는데, 혹시 연료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아무튼 모사드가 수차례 암살과 파괴 공작을 수행했지만, 시간을 늦췄을 뿐이지 원전 건설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습니다. 공습을 통한 완전한 파괴만이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레이더 탐지를 막기 위해 사막 지역을 초저공으로 비행하고, 또 레이더에 탐지되더라도 대형 민간 여객기로 오인되도록 전투기들끼리 공중 충돌이 우려될 정도로 날개와 날개를 바짝 붙여서 비행한 끝에 절묘하게 원자로를 폭격해서 파괴했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성공적인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작전의 개요입니다.
이란 공군의 오시라크 공습
그런데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은 몇 가지 단계로 실행되었고, 철저하게 이란과 이스라엘의 콤비 플레이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란 공군이(!) 먼저 미제 전투기를 동원해서(!!) 원자로 건설 현장을 공습했습니다. 이란 공군의 1차 공습은 원자로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고 공기를 지연시키는 수준이어서, 이란과 이스라엘은 좀더 대규모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이미 전면전 상태라 능력만 있다면 공습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과 이라크 사이에는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리아는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과 가장 치열하게 교전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시리아 영공 통과는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홍해로 살짝 나와서 요르단과 사우디 국경 지대와 사우디 북부 사막 지대를 통과하는 경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요르단과 사우디가 이걸 순순히 허용할 리가 없었습니다.
아래 지도의 빨간 선이 대략적인 이스라엘의 공습 경로입니다.

이스라엘의 공습을 위한 사전 공습 by 이란 공군
이스라엘 공군이 수행해야 할 작전은 장거리 공습인데다가 적대적인 국가들의 영공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공중 급유는 불가능했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라크 영공에 진입하는 바로 그 지점에 이라크의 대형 공군 기지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친구, 영혼의 단짝, 이란이 또 나섰습니다. 튀르키예, 시리아, 요르단 국경을 따라 먼 거리를 돌고 돌아서 이란의 Made in USA 전투기들이 사우디-요르단 국경에 접한 이라크의 공군 기지를 박살 내고, 지상에 있던 이라크 전투기들을 파괴한 것입니다. 이 초장거리 공습을 위해 이란 공군은 공중급유기와 공중조기경보통제기까지 동원하고, 산악 지대를 저공 비행하여 폭격을 성공시키는 위엄을 과시합니다. 이 공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바그다드 인근을 공습해서 이라크의 눈을 돌리는 성동격서 작전도 수행했습니다.
아래 지도의 파란 선이 대략적인 이란의 공습 경로입니다.

이란의 공격으로 위협이 사라지자 비로소 이스라엘 공군은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할 수 있었고, 사담 후세인의 핵 개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스라엘 공군의 위대한 성공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전개 과정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에 못지 않은 이란 공군의 작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유명한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작전은 이란의 도움이 없이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란하면 앞뒤 모르고 날뛰는 이슬람 광신도라는 선입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가 1981년인가 그랬습니다. 우리 공군은 21세기에 들어서야 급유기와 조기경보통제기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란의 국가 이념을 차치하고 본다면, 이란 공군의 작전 수립 능력과 수행 능력은 절대 이스라엘에 뒤쳐지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들)
한 때 이리도 우애 깊었던(?) 이란과 이스라엘이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공습을 주고 받고, 주변 대리 세력까지 이용해서 서로를 공격하는 사이가 된 것은,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증명하는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들만 모아도 역사책 몇 권은 너끈히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호치민과 미국이 2차대전 중에 몹시도 우호적인 관계였다든지,
쿠바의 카스트로는 어려서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 프로 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요청할 정도의 야구 소년에, 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든지,
1차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벌인 독일의 공작이 정작 미국의 참전을 불러일으켰다든지,
1차대전에서 해군력을 강화하려던 영국(그리고 처칠)의 무도한 욕심이 투르크를 독일 편으로 참전하게 만들었다든지,
CIA가 소련에 엿을 먹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할 때 가장 중요한 협력자가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든지
결과론이지만, 판단이 조금만 달랐다면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그러지 못해서 비극과 참극으로 치달은 아이러니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로 남을 것입니다.
댓글 (4)
-
에에이에푸
05.19 · 211.♡.104.84
-
AACEugene
05.19 · 219.♡.160.190
"1차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벌인 독일의 공작이 정작 미국의 참전을 불러일으킨~사건은 뭐라고 검색해야 찾아볼수 있을까요? ㅎㅎ 너무 재미있고 또 궁금해서 여쭤 봅니다 ㅋ
-
LLV426
→ ACEugene 작성자
05.19 · 39.♡.223.199
"짐머만의 전보" 사건이라고 합니다.
독일 외무장관 짐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전보를 띄웠는데, 멕시코를 꼬드겨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해서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걸 영국 정보부가 가로채서 폭로하는 바람에 미국 의회가 참전을 결의하는 스노우볼이 돼 버린겁니다.
-
LLV426
→ LV426 작성자
05.19 · 39.♡.223.199
미국 역사학자가 쓴 같은 제목의 "짐머만의 전보"라는 책도 있습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우방이라는 것은 없죠. 세계 정세의 흐름, 각국의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들,,,
고려할 것이 많기에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당시 정치환경을 보면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죠. 지금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아이러니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맞는 상황이었던거고
그 걸 지금 시점으로 잘했다, 잘못했다 논할 수 없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