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언어화한다는 것, 그리고 어린 날의 나에게...
아기고양이

Lv.1 아기고양이 (14.♡.156.50)

2026년 6월 6일 PM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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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렸던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감정 습관을 고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제가 자주 쓰던 감정의 깊은 근원부터 찾아보았습니다.

어릴 때 느닷없이 닥쳤던 어떤 일로 벅찬 기대가 무너지고 깊은 분노와 슬픔에 잠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슬픔을 제 때,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던 것에서 출발한 것 같습니다. 꽤 오랫동안 마음 아파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그때부터 슬픔과 죄책감을 쉽게 갖는 감정 습관이 배어버렸다는 것은 얼마 전까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고 제미나이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렇게 답을 줍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보다, 차라리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적인 위안을 주기 때문에 자책을 선택하게 된다. 내 탓이라면 다음에는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에 사람은 무력한 현실보다 자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걸 보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오랜 시간 감정을 잘못 써온 게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것도 나였구나.' 싶어서… 그런 제 자신을 딱하게 여기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도 왜 자책까지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는데, 묻어두었던 그때를 떠올리니 그제서야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것들이 방금 전의 일처럼 다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의 공기, 온도, 햇빛이 들던 방향,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소식을 초조하고 간절하게 기다리며 느껴야 했던 그 막막함, 답답함, 두려움, 공포 그리고 그 끝에 결국 맞닥뜨렸던 좌절과 분노와 슬픔이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던 제가 느꼈던 깊은 무력감이 결국 자책이라는 죄책감으로 이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문득 영화 굿 윌 헌팅의 대사가 생각나네요.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3년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이 한마디에 많이 울었는데 이 말을 이제는 어린 날의 제 자신에게 한 번씩 얘기해 주려고 합니다. 네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요.

그동안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오래된 습관대로 저 자신을 들들 볶아댔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고 있나, 나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일이 내게 생긴 걸까…' 하며 이유를 알고 싶어 했었구요. 

사실 그건 타인을 통해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확인을 받아 자책의 고리를 끊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고, 제 안의 어린아이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신호였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누가 확인해 주지 않아도, 자책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낼 수 있어야겠지요.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요. 

또 다시 안 좋은 감정이 밀려와 자책에 빠지려고 하는 순간이 오면, 호흡을 가다듬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려 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많이 힘들고 괴로웠던 나를 잘 토닥여주자.”라고요. 문제점을 인식하고 답을 찾아가는 저는, 이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사람이라 믿으며 용기를 북돋워 주려 합니다.

얼마 전 휴대폰 메모장을 정리하다가 이미 반년 전에 적어두었던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영하 작가님의 말씀이라는데 어디에 나온 건지는 모르겠어요.)

 

제 감정을 투명하게 돌아 봄으로써, 최근 저를 많이 힘들게 했던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비로소 소중한 단서 하나를 찾은 것 같습니다. 

비록 과정은 많이 힘들고 아팠지만, 왜 그동안 감정을 이렇게 써왔는지 제 삶을 톺아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갖고, 제 감정 습관을 찾고 고칠 기회를 갖게 되어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눈물이 나지만 자주 제 자신을 토닥이며 이제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다음 걸음을 내딛어보려 합니다.

+++책을 읽고 궁금한 점이 여러 가지 생겨서 제미나이와 챗지피티와 대화를 나눈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는 많은 얘기들을 나누며 제 감정을 돌아 보았고, 며칠간 많이 울고 쏟아내고 위로도 많이 받았습니다.

감정노트도 꾸준히 적고, 오래된 감정 습관과는 꼭 이별할 생각입니다.

댓글 (4)

  • 셀라비

    셀라비 Lv.1

    06.06 · 61.♡.40.20

    바쁘게 살더라도 때로는 자기 자신과 마주보는 시간도 필요한것 같아요. 그게 더 길게 가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셀라비 작성자

    06.06 · 14.♡.156.50

    네, 제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런 시간이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특별한 계기가 없이 돌아보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제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다른 분들도 그러실 수 있음 좋겠다는 생각에 작성한 글입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가랑비

    가랑비 Lv.1

    06.06 · 58.♡.137.93

    (물론 케이스마다 다릅니다. 모든 것에 다 통하는 법칙은 세상에 없을겁니다. ㅎㅎ)
    반복되는 감정이 있을 때, 슬픈 느낌이든 기쁜 느낌이든, 그것을 끝까지 파고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내 느낌의 원인과 시작점을 구체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합니다. 이제보니, 원글에서 적으신 '감정의 언어화'와 약간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기분이 든다. 이 세가지가 구체적으로 파악되면, '내가 이해하는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겨내든 무시하든, 이겨나갈 방향을 잡는데 쪼끔은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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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가능하면 지키려고 하는 것은,
    - 내가 의도적으로 타인을 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자책하지 말자. 당시 나의 무지함, 미숙함 등으로 인한 것이라도 자책하지 말자. 당시에는 나름 최선의 선택이나 행동을 한 것이니까..
    - 겹쳐진 아픔은 분리하자. 아픔에 한하여, 1+1=2 이지만 1+1+5=9, 1+1+5+1=30 과 같이 겹쳐지는 아픔은 나도 모르게 서로를 증폭시킵니다. 작게 쪼개서 '내가 이해하고 관리가능한 아픔 1'로 등록시켜야 증폭을 막을 수 있더라고요.
    - 언젠가부터, '포기' 좀 더 고급지게 적으면 'let it be' 마음이 많이 듭니다. 나이 먹으면서 귀찮아지는 것도 있을거고요. ㅎ. 가장 기본적인 먹고삶의 문제가 아니라면, 내 마음이 불편하여도 let it be 로 넘겨버리기도 합니다. 나중에 분명 후회하고 내가 제일 힘들어하겠지만, 일단 현재를 무사히 넘기기 위하여 'let it be' 시켜버립니다.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의식적인 무시/포기/단념 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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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 힘든 시간들을 가지며 살긴 하였으나, 다른 분들에 비하면 편하디 편한 삶을 살아왔고, 제가 가진 나름의 방법론도 제가 접한 일들 범위에나 적용될 일일 겁니다. 감히 다른 분들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니까'라고 적는 글은 아님을 다시 밝힙니다~~~.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가랑비 작성자

    06.06 · 223.♡.86.80

    네, 각자 처하는 상황도 다르고 느끼는 바도 다르고 감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조절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다 다를 거예요. 타인의 사례는 참고만 하는 것이지요.^^

    제가 예전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생겼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서 거울을 봐도 잘 모르겠는 거예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본 게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여러 사람한테 그런 얘길 듣는 게 의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슬픔이 남들에게도 보일 정도였나봐요.

    평소에는 시트콤 주인공처럼 지내왔지만 첫 인상으로 가슴 깊이 묻어둔 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아, 근데 저도 포기가 무척 빠른 면도 분명히 있긴 있는데 그게 안 되면 두고 두고 곱씹고 저 자신을 들들볶아 왔어요. 이제 이 고약한 감정습관은 꼭 버리고,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 자신을 좀 용서해주려구요.

    그리고 가랑비님 댓글 읽으니 감정의 언어화를 부정적 감정에만 쓰지 않고 긍정적인 감정에도 써봐야겠네요. 감정노트 착실히 잘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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