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3YNM4N (175.♡.147.253)
2026년 7월 15일 PM 06:25
며칠 전부터 몇 해 전에 써둔 소설을 퇴고하고 있습니다. 216장, 23만 자짜리 정치 드라마인데, 웹소설로 연재했다가 망한 작품이에요. 사이다도 없고 로맨스도 없고 주인공이 마지막에 왕관을 거부하니까... 당연한 결과였죠. 알고 쓴 거라 억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번엔 AI랑 같이 퇴고를 해봤는데요, 문단이 24,102개에서 11,769개로 줄었습니다. 근데 글자 수는 234,576자에서 237,421자로 늘었어요. 반으로 접었는데 부피는 커진 겁니다. 이상하죠. 근데 그 과정에서 제가 어디서 원칙을 깼는지 싹 다 드러났습니다.
AI가 지운 문장들이 전부 같은 종류였어요
AI가 찾아낸 걸 지웠는데,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는 왕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렸다」
「이제 돌아갈 곳은 없다」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부 한 종류더라고요. 제가 방금 쓴 장면을 제가 다시 설명한 거였습니다.
마지막 문장 상황을 설명드리면, 주인공이 왕좌를 부수는 대신 해체하고 왕관을 창고에 넣습니다. 부수면 그 자리를 원한 사람이 되고, 태우면 부정이 되는데, 창고에 넣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거든요.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자리에 두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그럼 원래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이죠.
여기까지가 장면인데, 저는 그 뒤에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또 적어놨더라고요. 이미 다 한 얘기를要 두 번 한 겁니다.
AI가 잘한 게 아니라, 제가 원칙을 깬 거였습니다
여기서 "AI 대단하다"로 끝나면 재미없잖아요. 사실 AI는 이 문장들을 만든 게 아니라 지운 거예요. 원래 장면이 이미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그 위에 부연설명을 덮어놓은 걸 걷어낸 거죠.
그러니까 질문이 저한테 돌아옵니다. 저는 저걸 왜 넣었을까요.
제 원칙은 하나였어요.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 216장 내내 지켰습니다. 근데 딱 네 곳에서만 깼더라고요. 이유는 뻔합니다. 독자가 못 알아볼까 봐서요. 이만큼 썼는데 안 읽힐까 봐 불안했던 거죠.
결국 원칙을 지킨 자리는 제가 자신 있던 자리고, 깬 자리는 제가 불안했던 자리였습니다. AI가 제 문장을 고친 게 아니라, 제 불안이 어디 있었는지 알려준 셈이에요.
근데 AI가 써준 것 중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구간이 있어서 AI한테 방향만 주고 한 장을 맡겨봤어요. 계산으로 사는 인물이 계산이 안 되는 상대를 만나는 장면이었습니다.
AI가 이렇게 써왔어요.
"그러면 그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뜻이다."
문장만 보면 좋아요. 그 장면만 떼서 읽으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근데 전체 흐름이랑 안 맞았어요. 이 소설이 왕권신수설에서 사회계약론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다루는데, 그 시점엔 아직 왕은 왕입니다. 이 인물은 왕정의 언어로만 사고하는 캐릭터라서, 무너지는 건 13장 뒤여야 하거든요. 여기서 미리 승복해버리면 뒤에 있는 장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AI가 틀린 문장을 쓴 게 아니에요. 맞는 문장을 썼는데, 여기 자리가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이게 문제입니다. 틀린 건 보이는데, 맞는데 안 맞는 건 안 보여요
이게 문장 하나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대 설정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오타 고쳐주고, 단어 골라주고, 문장 다듬어주고, 다음 문단 이어주고... 이 과정이 다 "실행"처럼 보이거든요. 매번 한 칸씩만 움직이니까 어디서부터 방향을 넘겨준 건지 경계가 안 보입니다.
저는 실행만 맡긴다고 생각했는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실행처럼 생긴 방향이었던 거예요.
정리하면
AI는 24,102개 문단을 셌고, 저는 못 셉니다. 부정 구문이 전체 문장의 9.6%라는 것도 AI가 알려줬어요. 중복된 장도 AI가 찾았고, 제가 어디서 불안했는지도 AI가 짚었습니다. 전부 AI가 저보다 나았어요. 딱 하나만 빼고요.
AI는 모든 소설에 맞는 답은 압니다. 근데 이 소설에만 맞는 답은 몰라요. 문제는 그 하나를 알아보려면 나머지 전부를 제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뭐가 어긋난 건지 알려면, 뭐가 맞는 건지부터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AI한테 다 맡기고 그 하나만 내가 지키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 사실 성립을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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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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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타늄
18:30 · 118.♡.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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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3YNM4N
→ 티타늄 작성자
18:41 · 175.♡.147.253
ㄷㄷㄷ.. 개발도 어느정도 글자? 수인지는 모르겠다만 소설은 워낙 글자가 많으니 그런거 같습니다 맥락을 끝까지 유지를 못하는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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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trz
18:32 · 180.♡.14.183
어... 이거 완전 오프 토픽이 될텐데 말입니다.
뭐랄까 이 게시글 자체가 AI가 썼거나 많은 부분을 감수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유독 AI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직접 쓰셨다면 AI의 영향을 과하게 받으신 것 같아요.
여하튼 AI는 유용한 도구죠. 스스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습관을 잘 찾아내 줘서 좋아요. 가끔은 어거지를 부리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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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3YNM4N
→ mtrz 작성자
18:41 · 175.♡.147.253
어.. ai가 많은 부분을 감수한건 맞습니다 ㅋ그래도 기본적인 내용자체는 제가 이렇게 가자라는것은 넣었고요 ㅋㅋ 요즘 글 길게 쓰려먼 ai 도움을 안받는건 오히려 이상해서요 (제기준) 근데 이번글은 좀 심하긴하네요.. 원래 한번 수정해서 보내는데 이번건 제목자체가 ai와 퇴고라서 신경안쓴듯.. 위탁해야되는데 의탁했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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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난난나나난나
18:40 · 202.♡.65.51
ai가 글을 그닥 잘 쓰지 않습니다. 문장은 글 좀 쓴다하는 인문대 학부 3, 4학년 수준입니다. 물론 교정, 교열을 익힌 사람 눈에는 고칠 부분이 많습니다. 단락과 문단으로 눈을 돌리면 반복과 과도한 수사가 글의 흐름을 해칩니다. 무엇보다 숙독이나 소리내어 읽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리듬을 거의 무시합니다. AI처럼 쓰면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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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3YNM4N
→ 난난나나난나 작성자
18:42 · 175.♡.147.253
제가 아마추어다 보니.. 중언부언이나 애매한것을 깔끔하겐 만들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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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난난나나난나
→ F3YNM4N
18:50 · 202.♡.65.51
쓸데없는 아는척이라 부끄럽습니다. 게으른 저와 달리 글쓰기를 이어가시는 모습이 멋집니다. 즐거운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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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3YNM4N
→ 난난나나난나 작성자
18:53 · 175.♡.147.253
아뇨 적절한 말이였죠 ㅎㅎ.. 제가 글을 아마추어수준으로 쓰니 좋아 보인거구요. 그래도 완전히 딸깍으로 쓰는건아니다만 가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ㅎㅎ. 이번글도 대충논지를 잡고 내 실수 사례주고 글로 만들라 시키고 검수 안하고 바로올린 유혹같은거요
- 무
무한
18:40 · 59.♡.30.115
웹소설, 장르소설 시장에서의 독자를 상대할때.
작가의 덕목은 장면의 뜻을 해석하게 만드는 수준 높음 보다는
이게 뭔 재미인지 그때그때 확실하게 보여주는 상업적 접근이라고 봅니다.
AI는 이 재미를 논리로만 알아서, 실제 독자의 감성과 뚝 떨어져 있어요 아직은.
사이다 없어도, 로맨스 없어도, 주인공이 마지막에 취향과 다른 짓을 해도
재밌는 글 많거든요.
이 감성을 AI는 도통 제대로 짚질 못해요. -
FF3YNM4N
→ 무한 작성자
18:43 · 175.♡.147.253
맞아요.. 근데 그걸 제가 그렇게 못써서 그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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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발에만 사용하는데, 처음에 목적과 이유를 세세하게 정해서 바꾸고 싶은 걸 넣어주면 잘 동작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아무래도 개발과는 많이 달라서 장편소설은 쉽지 않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