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냥이집사 (222.♡.172.15)
2026년 7월 26일 PM 10:21 · 수정 3회(22:3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처음 본 건 <환상의 빛>이었습니다. 1997년인지 1998년인지도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데, 사당역 근처에 있던 문화학교 서울에서 봤습니다.
히로카즈의 장편 데뷔작, 마보로시. 빠트리샤르꽁뜨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 떠 오르기도 했던. 말보다 침묵이, 황금빛 화면 때깔이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 그 여백이 너무 좋아서 이후 히로카즈 영화를 빠짐없이 챙겨보는 자칭 팬입니다.
좋아하는 히로카즈 영화 중 <원더풀 라이프>
이 영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 나옵니다. 거기서 평생의 기억 가운데 딱 하나를 골라야 해요. 그러면 직원들이 그 기억을 짧은 영화로 만들어주고, 사람들은 그 장면 하나만 품고 사후세계로 갑니다.
그런데 사후세계 문턱에 있는 사람들이 고르는 게 거창한 성취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비행기 창밖의 구름, 얼굴에 닿던 가을 햇살 같은 것들 입니다. 삶이 다 지나간 뒤 떠 오르는 건 뜻밖에도 이렇게 소소하고 평범한 순간들이더라구요.
<원더풀 라이프>의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내게도 평생의 기억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울 딸이 중학생이던 어느 봄날. 그날은 외부 행사에 참석했다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던 길. 아직 저녁이 되기 전이었고, 봄 햇살이 참 좋았습니다.
아파트 안을 걷고 있는데 체육복을 입고 학원에 가던 딸이 저를 발견하더니, 두 팔을 뒤로 쭉 젖히고 두 발을 어깨너비로 딱 벌린 채 저를 올려다봤습니다.
“아빠.”
저를 발견하고 온몸으로 반겨주던 우리 딸이 너무 이뻤어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울딸의 포즈, 표정,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오래전에 본 <원더풀 라이프>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아마 이런 생각 때문일 겁니다.
그게 행복인지 슬픔인지, 혹은 미련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삶의 마지막에 문득 떠오르는 장면은 있겠죠.
제게는 아마 햇살 좋던 그 봄날, 저를 반겨주던 중딩 딸의 모습도 그중 하나일 겁니다.
희로애락. 다들 인생에서 이런 장면 몇 개쯤은 품고 계시죠?
댓글 (7)
- 펠
펠트리
07.26 · 220.♡.138.176
- 똥
똥냥이집사
→ 펠트리 작성자
07.26 · 222.♡.172.15
전 아무도 모르게도 좋아하는 ㄷ ㄷ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는 엉엉 운 기억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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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미니쓰
07.26 · 58.♡.174.6
원더풀라이프.
구 여친, 여 와잎과 첫 대이트로 봤는데… 조용히 졸고 계셨습니다 ㅎㅎㅎ
- 똥
똥냥이집사
→ 지미니쓰 작성자
07.26 · 222.♡.172.15
ㅋㅋㅋ 울 와이파이님도 주무셧어요. 꿀잠
- 칸
칸추리
→ 지미니쓰
07.26 · 1.♡.164.115
기절할 정도로 좋은 영화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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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ilvercreek
07.26 · 121.♡.214.196
햇빛이 샴페인 파우더처럼 부서지던, 햇빛에 비해 살갗에 닿던 바람은 차가웠던 오월 어느날 집사람과 밖에서 마셨던 커피 한잔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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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비령
07.26 · 221.♡.89.131
저도 좋아하는 감독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팬이라 더 그렇기도 하고요.
저는 어떤 기억을 가져갈지 한 가지만 고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앞으로 찬찬히 찾아봐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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