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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인문학 2. 시(생각과 마음에는 높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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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생각과마음 45.♡.203.31
작성일 2024.04.2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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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인문학 1. 이야기(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다)

내가 이해하는 인문학 2. 시(생각과 마음에는 높이가 있다)

내가 이해하는 인문학 3. 역사(너무 가까운 건 볼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인문학 4. 철학(생각을 도구화하다) - 작성예정


한때, 인문학 열풍이 불었습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 글을 써보려고 한 적이 있었지요. 개인적인 일로 미적거리는데 유행이 지나갔습니다. 유행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성격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다모앙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준비했던 걸 여기 적으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부족한 글이라 그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인문학이란?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학문'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직관적으로 확 다가오는 건 없습니다. 학문으로는 문학, 역사, 철학을 가리키는데, 줄여서 '문사철'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문사철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까지 아우르는 학문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지만, 역량이 부족하여 '문사철'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문학입니다. 문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시에 관해서만 얘기하겠습니다.

문학: '이야기'에 관해서

문학은 왜 필요할까요?, 문학이 실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기 때문"이라고.

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다

'슬프다'는 단어를 반복한다고 해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단어의 뜻이 '슬픔'인 건 맞지만, 이 단어가 '감정'을 전달해 주지는 못합니다. '슬픔'은 슬프다는 '단어'가 아니라 슬픈 '이야기'를 들을 때 느껴집니다. '슬픈 이야기'는 '슬프다'는 단어 한 번 사용하지 않아도 '슬픔'을 전달할 수 있지요.

슬프다는 단어는 '이름'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짜장면이 있고 그 앞에 짜장면이라는 이름표가 있다고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짜장면이 음식이고 이걸 먹어야 배가 부릅니다. 짜장면이라는 이름표는 이 음식의 '이름'이 짜장면이니까 나중에 이 음식을 먹고 싶으면 '짜장면'을 달라고 하면 된다고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짜장면이라는 음식과 짜장면이라는 이름을 구분해야 합니다.

음식과 음식이름은 다르다

실생활에서 얘기할 때, 짜장면이라는 음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애기하진 못하겠죠. 짜장면이란 '이름'만 가지고 얘기합니다. 짜장면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모두 이름만 가지고 얘기합니다. 짜장면처럼 눈에 보이는 건 이름과 실체를 잘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감정같이 보이지 않는 걸 얘기할 때 생깁니다.

슬프다는 단어는 '이름'이지 슬픔이라는 '감정'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걸 얘기할 때, 이름과 실체를 혼동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들 든 것처럼, 어떤 단어를 적어놓고 그 단어를 통해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슬픔' 뿐만 아니라 다른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적어놓고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설레다'는 단어가 있습니다. '설레다'는 단어를 적어놓고 마음이 설렐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얼음이 있을 뿐이다. - 민태원, '청춘예찬' 중에서

반면, 슬프다는 말 한 번 쓰지 않고 슬프게 하는 글도 있습니다.

이 주일의 죽음 - 생활고 시달리던 세 모녀 동반자살 | 일요신문

어머니 박모(당시 60세)씨는 큰딸(35세), 작은딸(32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작은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간이 돈을 벌었지만 생활비와 병원비로 빚이 쌓이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는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후부터 어머니가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지만 극단적 선택 한 달 전 빙판길에 넘어져 팔이 부러진 이후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절망감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석 전 계장은 “수사할수록 ‘어떻게든 악착같이 세 식구가 버텨왔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세 모녀는 끼니를 라면으로 때울 때가 많을 정도로 쪼들렸지만 공과금이나 월세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자신들의 힘으로 삶의 무게를 버텨 온 세 모녀는 기초생활보장제도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으로 파악됐다. 석 전 계장은 “복지혜택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이웃이나 지인에게도 어려운 사정을 알리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파구 세 모녀 자살사건

슬프다는 단어가 슬픈 게 아니라 슬픈 이야기가 슬픕니다.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현실에서 경험한 슬픔이 느껴집니다. 감정이 마음에서 재현되는 거죠. 따라서, '슬프다'는 '단어' 적어놓고, '슬픔을 느끼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다

배 부르면 배고플 때완 행동이 달라집니다. 허겁지겁 음식을 찾지 않게되죠. 생각도 달라집니다. 조급해서 매정했던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감정을 경험하면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감정이 채워지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가까운 분이 돌아가시면, 삶이 허무하다는 말이 체감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 않던가요? 응원하던 팀이 우승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실수한 선수에게도 관대해지지 않던가요? 대하기 어려웠던 상사에게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붕 뜨지 않던가요?

양치질 안하는 아이가 양치질 잘하게 되려면, 이가 아파서 치과치료 받는 경험을 하는 게 가장 빠를겁니다. 여기엔 고통이 포함되었지만, 불쾌한 감정 때문에 양치질하게 했다고도 얘기할 수 있을겁니다. 사람들이 게임에 돈, 시간, 에너지를 쏟아붇는 이유는 재미라는 감정을 경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감정을 경험하는 건,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어만 말하는 건, 음식은 주지 않고 음식이름만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짜장면 이름만 말하고 배부르길 기대하진 않겠죠. 하지만, 말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쁘다, 설레다, 즐겁다, 섭섭하다, 안타깝다, 슬프다 등. 이름만 잔뜩 말하고, 실제 그 감정이 전달되었을 거라 착각할 수 있다는 거죠.

감정 전달하는게 이야기다

이쯤에서 갑자기 두려워지는 건, 앙님들 중에서 "내가 예전에 직장 생활할 때는..."을 자신 있게 하는 분이 계실까봐입니다. '나 때' 속에 어떤 요소가 들어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야기에서 핵심은, 들었을 때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경험, 소문, 생각, 짧은 글 등 어떤 것도 맥락에 따라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때' 안에 '이름'만 잔뜩 들어있는지, '감정'을 건드릴만한 부분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 지 점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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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만 오가는 얘기, 지루합니다. 조금이라도 감정이 느껴져야 재미가 생기겠죠. 이야기를 너무 많이하면, 장황해질 수 있지만 소금처럼 적절하게 활용하면, 대화에 생기가 돌 수 있습니다.

삶으로 이야기하자

문학은 왜 필요할까요?, 문학이 실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까요? 문학을 이해하면, 삶에서 '단어'가 아니라 '이야기'를 활용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실생활에서도 '감정'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거죠.

기념일을 잘 준비해서 '뜻밖의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려깊은 행동을 해서 '배려받음'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바쁘더라도, 외로워하는 사람과 함께해서 '소중하게 여겨짐'을 전해줄 수도 있겠죠.

삶으로 이야기를 쓰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죠. 선거기간 중 인사 몇 번 하는 게 이야기가 아닙니다. 긴 기간 선택와 결단, 좌절과 극복, 감동과 기쁨을 보여주어야 이야기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끓어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이름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들면 그렇게 됩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각자의 가슴에 다양한 감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든 이름, 우린 그걸 '전설이 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노무현'이란 이름이 그렇지요. '노무현' 뿐만 아니라 민주진영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전설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문재인', 그리고 이번 총선을 통해 '이재명'도 전설의 반열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국'과 '추미애'도 후보가 되었구요.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우린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여기 다모앙에도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삶으로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 저는 이것이 문학의 필요성이고 문학이 주는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에 관해서는 다음에 적어야겠네요.


시에 관해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시: 생각과 마음에 관해서
사전에서는 시를,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다."(위키백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에는 감정, 운율, 압축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라는 게 뭔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설명과 다른 예외도 많은 것 같았으니까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는데 좋은 시가 있었고, 운율이 없고 압축되지 않은 것 같은데 좋은 시가 있었습니다. 일상언어를 사용하는데 좋은 시도 있으니까요. 김남조 시인의 '서시'가 그랬습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 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김남조, '서시' 전문


이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했지만, 위에 인용한 '시의 정의'에 비추어 보아선 왜 좋은지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했다기 보다는 생각과 마음을 표현했고, 운율과 압축이 있어보였지만, 탁월하는 않았으니까요. 좋은 시가 뭔지 아는 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건 아니니 파고들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고민해 보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시가 인생에 도움을 준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 시가 좋은 이유도 자연스럽게 깨달아졌습니다. 깨닫고 보니 제가 이 시를 좋아한 이유는, 이 시에 담긴 '생각과 마음의 높이' 때문이었습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에 관한 문제에서 저와 다른 생각/마음 높이에 있었단 거죠. 분명 저보다 높은 곳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높음'이 읽을 때마다 만족감을 주었던 것 같았습니다.


시는 높은 생각/높은 마음이다

물이 현재 위치보다 내려가려는 게 본성이라면, 생각과 마음은 지금보다 자라려는 게 본성같습니다. 자라려는 게 본성이기에, 생각과 마음이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글, 높은 생각과 높은 마음이 담긴 글에 끌리는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높은 생각과 마음에 끌리는 예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생각납니다. 유시민이 출연한 동영상은 매우 많은 조회수를 기록합니다. 단지 정치평론인데 말이죠. 새로운 과학기술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한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같은 상황을 겪고, 같은 뉴스를 보고 평론하는 건데. 왜 사람들은 그의 얘기를 듣고 싶어할까요? 왜 그의 얘기를 들으면, 정리가 된다고 말 할까요? 암울한 시대에 희망이 보인다고 기뻐할까요? 한마디로 그의 생각과 마음이 높기 때문 아닐지요. 그가 높은 곳에서 현실을 보라보고 얘기해 주기 때문 아닐지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상황을 바라보는 높이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나무에 올라가라고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자기가 처한 위치를 가늠하라는 거죠. 전체 숲을 알고 내 위치를 알면 안심되니까요. 놀랐던 가슴이 진정되고, 당황했던 마음이 침착해지죠. 곧이어 가야할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되고, 장애물을 극복할 의지를 다지게 되죠. 길을 잃었다는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그 상황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생각과 마음은 높아지고 싶어한다

그러면,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생각과 마음이 높다는 건 뭐고,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높아질 수 있느냐입니다. 뇌과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성숙한 인격의 특징으로 '자기객관화'를 말합니다. '자기객관화'가 곧 높은 생각과 높은 마음은 아니더라도 '높은 생각/높은 마음'에는 반드시 '자기객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과 마음은 어떻게 높아질까요? 제 젊은 시절, 생각과 마음이 괴롭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백석 시인의 시집을 수 백번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왜 그 시집이 끌렸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건 '생각과 마음이 자라고 싶어하던 시기'였단 거죠. 자라고 싶어하던 생각과 마음이 높은 생각, 높은 마음에 이끌려 찾아갔던 거라 이해했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높아지는지, 백석 시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씨 봉방'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시에서 생각과 마음이 자라는 과정을 매우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는 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달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 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 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꿀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씨 봉방' 전문


제가 이 시를 읽을 때는 백석 시인이 유명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수능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해 졌더군요. 백석은 일제시대를 살아간 시인입니다. 저항시인까지는 아니었어도 소극적 저항시인 정도는 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시인은 어느 땐가 가족과도 헤어지고, 남신의주 유동에서 목수 박씨의 집에 세들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의 제목은 시인이 살던 집 주소인 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기 처지를 돌아보면서 자책, 후회, 슬픔 같은 걸 되뇌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이렇게 일제에 협조하는 않는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가 이런 걸 알아주기나 할까? 내가 대단한 애국자도 아닌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능력이 없어서 궁핍하게 사는 걸 일제에 저항한다고 핑계대는 건 아닐까? 내가 괜히 가족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요? 저라면 이랬을 거라는 추측일 뿐 근거는 없습니다. 

사실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자기 '못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성찰을 했다는 거죠. 자기 '못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건, 아프고 부끄럽습니다. 그걸 안 봐도 뭐라할 사람 없기도 하고요. 못난 행동 하도록 원인제공한 사람도 있을테니 그사람 원망하는 게 더 쉽기도 할테고요.

그럼 왜 못난 부분을 바라봐야 할까요? 못난 부분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 부분을 잃기 때문입니다. 못난 것도 나고, 잘난 것도 난데, 못난 부분 안보고 잘난 부분만 보면, 못난 부분은 사라지고 잘난 부분만 남게 됩니다. 잘난 나만 골라내면, '나'는 작아지고, 파편이 되고, 조각이 됩니다.

요새 유행하는 단어가 있어서 설명이 쉽네요. '선택적 인간'이 된다는 거죠. 작은 일에 분노하고 큰 일에는 무관심해 집니다. 불이익에는 민감하고 불의에는 둔감해 집니다. 힘 없는 자에게 가혹하고 힘 있는 자에게 관대해 집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해집니다. 논리와 근거를 중요시 하는 것 같지만, 내 편 주장은 무논리무근거여도 지지하게 됩니다. 이런 게 선택적 인간에게는 문제가 안됩니다. 그는 파편이고, 조각이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못난 부분을 바라보면 성장합니다. 다른 무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못난 부분은 선명해지고 나로 통합되어 나를 성장하게 합니다. 이 시에서는 성장의 결과물이 '갈매나무'입니다.

잘난 나와 못난 나가 하나로 통합되어 현재 자기 선택과 처지를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저 인정한 모습. 그게 갈매나무입니다. 이건 시인이 도달한 생각과 마음의 높이인데, 그걸 시인이 바라보는 겁니다. 자기객관화가 되었다는 거죠. 못난 부분도 '있는 그대로' 보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객관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객관화는 성찰의 결과이다

시는 실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까요? 시는 생각과 마음이 자라고 싶어한다는 걸 알려줍니다. 또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면 세상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생각과 마음 높은 사람이 많아지게 도와줍니다.

생각과 마음 낮은 사람이 많아지면 어떤 사회가 되는지, 지난 몇 년 충분히 보았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지만, 그들이 외친 공정과 정의는 '선택적'이었죠. 공정과 정의 뿐 아니라 그들이 주장한 모든 주장이 '선택적'이었습니다. 더 이상하고 기괴한 건, 그게 그들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죠.

전 아직도 여성가족부 폐지가 시대적 과제인 것처럼 주장했으면서, 존속해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합니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당당하게 브리핑해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신기합니다. 못난 부분은 지워버리고 잘난 부분만 기억하려는 그들이 신기합니다.

그러니 생각과 마음 높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행인 건,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는 게 학력, 지능, 지식과 상관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못난 부분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그것이 통합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 이건 정직, 용기, 방향의 문제지, 학력, 지능, 지식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서울대가 아니라 하버드를 나와도 이게 안되면, 선택적 인간에 머물 뿐이란 거죠.


높은 생각은 시가 된다 

시를 글로만 쓰는 건 아닙니다. 선택과 행동으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총선을 통해 '높은 생각/높은 마음'을 여러 개 보았습니다. 김어준 총수가 여론조사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이재명 대표가 '준연동형 유지'를 결단한 것, 조국 전 장관이 조국혁신당을 창당하고 출마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판단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알았던 건, 이게 높은 생각과 마음에서 나온 판단이란 점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높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특정 영역에서 높을 뿐이죠. 특정 영역에서 충분히 성찰을 거쳐 자기객관화를 한 사람이 행한 선택이라면 결과에 관계 없이 존중할 준비가 되어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 다모앙에 모인 것도 각자 생각과 마음의 높이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선택한 결과입니다. 사이트를 만든 대장님이나 저를 포함한 모든 분들이요. 어떤 의미로 시를 만들고 시를 말한 것이겠죠. 이 시가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기를 기대합니다.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면, 행동이 시가 되고 말이 시가 됩니다.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도록 도와주는 것, 저는 이게 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 주장합니다.

추가
1. 본문 변경: 생각 → 생각과 마음(*따라서, 시는 '높은 생각'이 아니라 '높은 생각과 마음'이 됩니다.)
2. 닉네임 변경: 생각의높이 → 생각과마음

댓글 9 / 1 페이지

믹스다모앙님의 댓글

작성자 믹스다모앙 (58.♡.102.214)
작성일 04.21 23:52
감사합니다.

담배가게삼촌님의 댓글

작성자 담배가게삼촌 (222.♡.165.252)
작성일 04.22 11:40
오~ 2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믿고 선추천, 선플후감상!
이번에도 고맙습니다.

생각의높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생각과마음 (124.♡.104.76)
작성일 04.22 11:54
@담배가게삼촌님에게 답글 기다리셨다니 제가 감사하네요.

담배가게삼촌님의 댓글

작성자 담배가게삼촌 (222.♡.165.252)
작성일 04.22 11:58
첫 도입부부터 제 생각과 같아서 집중해서 읽어 나갔습니다.
저도 시가 뭔지 종잡을 수 없었거든요. 아니 지금도 종잡을 수 없거든요. 생각의높이님의 깨달음을 엿보며 저도 얕긴 하지만 뭔가 '아!' 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생각의높이님의 깨달음에 편승하기 위해서 또 다음글을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게으르거든요. 히히.. 부끄럽네요..

생각의높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생각과마음 (124.♡.104.76)
작성일 04.22 12:00
@담배가게삼촌님에게 답글 잘 읽어주셔서 글 쓸 힘이 납니다.

환이아빠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환이아빠 (118.♡.18.62)
작성일 04.23 11:52
나이를 먹다보니 자기의 부족하고 못난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 너무 높은 경지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도 내 자녀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것의 출발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인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 이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나가다가 발견해서 너무 감사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미자르님의 댓글

작성자 미자르 (106.♡.128.34)
작성일 04.25 13:41
덕분에 오늘 하나의 '높은 생각'을 잘 읽었습니다. 곱씹게 되는 메시지네요. 요즘 스스로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고 침울해지기도 하는데, 종종 갈매나무를 떠올려보아야겠습니다.

쭌찬이네님의 댓글

작성자 쭌찬이네 (112.♡.49.246)
작성일 04.27 22:52
생각이 많아지는 좋은 글 입니다.

그다음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그다음 (116.♡.90.89)
작성일 04.30 12:34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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