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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전방 후원분 미스터리

Lv.1 피콜롤로 (220.♡.204.226)

2026년 2월 7일 PM 07:58 · 수정됨(02. 1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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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 산의 아래에 국립전남 수산양식연구 사업소가 있습니다.

원래 삼산국민학교 자리입니다.

학교 부지 안에 100톤 내외의 대형 고인돌로 추정되는 반듯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흔히 보는 납작한 돌이 아니고 거의 두께 2미터에 길이 3미터 높이 2미터 정도 크기 (국민학교 시절 기억이라 왜곡 가능성 있음)입니다.뒷산에서 굴러 떨어진 돌이라면 멋대로 서 있어야 하는데 반드시 세워 정돈된 느낌입니다.국민학교 설립된 당시나 이후 크기로 보아 절대로 몆십명의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는 크기입니다.

틀림없는 고인돌의 개석 즉  윗돌입니다.받침돌은 당시 안 보였던 것 같기도요.

지금도 있는지는 모릅니다.몆십년 전에 이웃 신홍제 제방 보수 공사를 하면서 사방의 바윗돌 다 가져가고 심지어 깨어서도 가져가 공사를 했습니다.

공공시설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어서 현재도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을 못했습니다.

앞은 하천의 둑 

산의 앞쪽 들녁을 가로질러 강폭 100미터 정도의 개천이 흐릅니다.

지금은 평시에는 대부분의 물이 바닥 속으로 흐릅니다.

모르지만 혹시 삼국시대 초기까지도 수운으로서 작은 배들이 다닐 정도의 수량이 있는 수로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기후가 지금과 같았는지 달랐는지 그래서 배가 다닐 정도의 수량이 유지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전방 후원분이 있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 

이 개울물과 중간에 이 개울로 합쳐지는 작은 개울물로  보수적으로 잡으면 아마도 50000평(250마지기) 이상의 벼농사가 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이 개울이 발원지까지 직선거리  3km쯤 됩니다.개울 주변이 모두 벼농사가 가능할 수 있지만 개울보다 높은 지대는 벼농사 불가능했겠죠.일제 강점기 화학비료 없이 벼농사는  풍년이면 1마지기 2섬 (240kg)이었다고 합니다.그럼 이 개울에서 벼 500석 정도가 수확될 수도 있었습니다.그러나 풍년인 경우이고 농약이 없던 시절이고 다수확 품종개량된 안된 시대이니 200석만 잡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개울 말고 위 2번째 사진의 하천둑의 개천은 조각배도 다닐 수 있는 강폭이고 수량이 훨
씬 많습니다.현재도 이곳에서 보를 만들고 인공수로를 만들어 이 들판에서 넓은 면적으로 벼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공수로로 공급되는 물로 또 벼농사를 하면 역시 보수적으로 잡아도 100석은 될 수 있겠죠.

이게 다는 아닙니다.

위 2번째 사진의 둑 반대편에 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습니다.이곳은 산에서 내려오는 별도의 개울이 있고 이 큰 개천에서  인공 수로를 만들어 논에 물을 댈 수 있습니다.삼국시대에는 아마도  개천이 고정되지 않고 홍수가 날때마다 수로가 변경되는 시절이라  몆십만평의 들녁이라도 반은 개천 반은 농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논이 있었다 해도 변경되는 수로 때문에 그다지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겠죠.그래서 보수적으로 잡아 벼농사는 100석만 계산해 봅니다.

이 들녁에서 벼농사 뿐만 아니라 밭도 많아 조(기장) 수수 콩 같은 밭농사로도 많은 수확량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벼농사 수확량만 최소로 잡아도 400석은 나오는 곳입니다.

이게 다는 또 아닙니다.


여기는 서쪽이고 동쪽으로도 똑 같은 면적의 농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족장(군장)이 서쪽과 동쪽 두명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정도 곡물이 생산된다면 그만한 인구를 수용할 수 있고 지배자인 족장은 100톤 크기의  고인돌 조성도 하고 전방 후원분도 만들지 않았을까요?

작은 개울 두개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이 개울 유역은 완만한 경사지라 홍수피해를 거의 입지 않을 곳입니다.

두개의 개울 중 큰 쪽은 여기서 1km 상류에 "돌포"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돌" 즉 石 .쓸모없는 뜻입니다.

포구인데 현재는 배가 못 들어온다 해서 돌포입니다.

돌포라도 배가 들어올 정도의 하천이라면 상당한 인구가 거주했다는 뜻입니다.

사진이 뒤죽박죽으로 올라갔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이 동네와 주변에 같은 반 친구들이 살았습니다.

저도 우리동네 아니지만  그 당시부터이 유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말뫼뚱"이라 불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말이 있었고 말을 묻은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주변이 모두 민둥산인데 이곳만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했습니다.

용두리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보호를 해서 소나무를 안 베었습니다.

"말뫼뚱"에서 "말"은 승마용 말이 아니고

말 ㅡ>마리 ㅡ>머리 ㅡ>우두머리 ㅡ>족장 (군장 )

이었겠죠.

"뫼뚱"은  묘의 해남사투리입니다


후원입니다.

뒤쪽은 원형입니다.

중간은 잘룩해 장고형 무덤이라고도  부릅니다.

전방후원분이라는 용어가 이미 익숙해졌는데요.

웅장합니다.

앞쪽은 각이 졌습니다.

 모가 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시면 멀리 직선거리 2km까지 들녁입니다.

(사진 위치 바꾸기가 안됩니다)

이 넓은 들녁을 지배한 자가 족장이 되어 이런 큰 무덤을 축조한 것이겠죠.

무덤 축조 시기와 무덤 주인공의 국적에  관하여 논란이 많던데 생략합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압록강 유역에서도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고 경기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참 미스터리입니다.

일본의 왕실 무덤형식이라는데 왜 남해안에서도 발견되고 경기도의 백제지역에서도 발견되는지요.


나이 드니 다른 것은 별 재미없고 이런 것에 재미를 느낍니다.

오늘 날이 추워 농사일 미루고 사진 찍어 와서 올립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1)

  • 피콜롤로 Lv.1 작성자

    02.11 · 112.♡.69.51

    이글 수정해 다시 쓰려 합니다.사진이 뒤죽박죽 올라가 순서를 수정하지 못하고 설명하다 보니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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