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글을 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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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써봤던 연필은 품질이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침을 발라서 써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있는 게 그것 뿐이라서 쓴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시절 크레파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림일기의 종이 질도 좋지 않고, 크레파스도 거칠었습니다.
내 마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친 그림일기가 그려졌습니다.
그래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의 제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플라스틱 속에 들어 있는 돌려서 쓰는 색연필을 쓰게 되었습니다.
신세계더군요. 동일한 품질에 부드럽게 써지는 색연필로 그리는 그림일기는
정말 작품을 보는 듯 했습니다. 물론, 그림을 멋지게 그린다는 의미는 아니고,
아주 단정하고 색이 예쁜 그림일기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 즈음부터 연필도 품질이 좋았습니다. 아마 품질이 좋은 연필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제가 접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좋은 연필과 좋은 색연필로 화가가 된 듯 했습니다.
학년이 높아지며 샤프도 써보게 되고, 볼펜도 써보게 되고.
필기도구가 바뀜에 따라 글씨를 쓰는 성향도 바뀌었습니다.
꾹꾹 눌러서 써야 되는 게 아니라, 힘을 덜 주고 스무스하게 쓰는 걸로 바뀌었지요.
그렇다고 저의 글씨가 무척 현란한 명필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악필이었지요. 제가 썼던 글을 읽을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글은 그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고 하는데, 아.. 이 기준은 뭔가 바꾸고 싶었습니다.
저도 잘 써보고 싶은데, 손가락이 제 마음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컴퓨터라는 요상한 물건이 나왔습니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키보드라는 걸 눌러서 글씨를 씁니다.
점점으로 보이는 화면에 제가 꾹꾹 누른 게 글씨로 되어서 보입니다.
오.. 신기합니다. 도트 프린터라는 걸 이용하면 찌익찌익 소리를 내며 찍어냅니다.
각진 폰트로 찍혀진 저의 글씨를 봅니다.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손가락 아프게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이제는 글씨를 쓰는 기회가 더 적어졌습니다.
가끔 아주 짧은 몇 문장의 글씨를 쓰려고 하면 아주 손에서 쥐가 납니다.
연필을 움켜 잡는 것도 힘들고, 정자로 한 자 한 자 적어나가는 게 어렵습니다.
키보드로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다 보니,
머릿속에서는 이미 한 문장이 지나갔는데, 연필로 쓰는 글자는 따라 오질 못합니다.
연필로 적는 글자 속도에 맞춰서 몇 번이나 문장을 붙잡고 또 붙잡습니다.
기술이 좋아지니, 이제는 말을 하면 그걸 알아듣고 글자가 써집니다.
세상은 날로 좋아지며, 이제는 악필이라고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글씨가 아니라, 그 사람이 중요하게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결국, 본질에 더 깊게 다가가는 세상으로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앙님의 글쓰기는 어떠했나요?
궁금합니다.
끝.
벗님님의 댓글의 댓글
왠지 친밀감이 느껴집니다. ^^
어디가니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