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페이지] 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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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하늘걷기 121.♡.94.37
작성일 2024.09.20 19:19
분류 한페이지
142 조회
2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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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함이 많아졌다.

 

조금 움직이면 피곤해서 일어나야지 하다가도 금방 주저앉았다.

 

오늘부터 주변 정리도 하고 환경을 바꾸면 달라지겠지, 생각하다가도 그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생각만 하다가 말았다.

 

그날 쓰러진 사람을 괜히 도와주려다 봉변을 당했다.

부축해서 병원이라도 데려가려고 했는데 배고픈 흡혈 인이었고 그가 나를 물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니 그는 사라졌고 메모지에 <미안합니다.>라는 글씨만 적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흘을 앓았고 사흘 뒤 거울 속에는 창백한 얼굴의 내가 보였다.

 

원래 밤에만 활동하고 그나마 낮에는 암막 커튼으로 빛없이 사는 게 익숙했던 터라 밤낮의 변화는 없었다.

문제는 흡혈 인이 되자 활력이 넘쳤다는 거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꺼내서 닦고 쓸고 배치를 바꿔보기를 며칠, 슬슬 배가 고파졌다.

 

알려진 대로 흡혈 인이라고 피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일반식을 먹으면서 조금씩 사람의 피를 섭취하면 된다.

그런데 판매되는 식용 인공 피는 비쌌다.

 

애완동물의 피를 뽑거나 사람의 피를 불법적으로 채취하고 섭취하는 건 불법이다.

불법일 뿐만 아니라 무슨 병균에 감염됐을지 모르니 자제하라고 계속 방송에서 강조한다.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각종 인공 피 광고의 끝은 그런 경고를 붙인다.

 

나도 깨끗한 인공 피를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

나를 물었던 자도 돈이 없어서 참다가 쓰러졌고 어설픈 정의감의 나를 물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이러다 죽을 생각이다.

 

어차피 원래도 오늘내일하던 몸이다.

암에 걸린 나는 그날 항암치료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흡혈 인이 됐다고 병이 나은 것도 아니다.

병은 병대로 갖고 있고 거기에 흡혈까지 해야 하는 신세다.

 

IT 재벌로 유명한 자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괴짜로 유명한 그는 먹고 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조금의 에너지로 활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회사를 또 하나 만들었다.

그 회사가 만든 제품이 인공 피를 이용한 오렌지 주스였다.

 

에너지 주스라는 이름의 활력을 주는 주스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중 일부가 이상 현상을 일으켰고 흡혈 인이 탄생한 것이다.

 

자신도 흡혈 인이 된 재벌은 다양한 맛을 내는 인공 피를 계속 만들어 냈다.

독점으로 가격을 계속 올려서 나 같은 서민은 명절에나 한번 먹어 볼 비싼 가격이 되었다.

 

인공 피를 먹으면 지병이 있어도 잠시 동안은 발병하지 않고 늘 활력이 넘친다.

흡혈은 돈 있는 사람의 병이 되었고 나 같은 사람은 그냥 이러다 죽을병이 된 거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고 일어나도 피곤하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인공 피를 몇 배나 희석한 음료는 그나마 하나 살 수 있을 것 같다.

 

마트를 향해 걸어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에 초점이 맞지 않아서 몇 걸음 걷다가 쉬고 또 몇 걸음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다가 쓰러졌다.

 

“…괜찮으세요?”

 

정신을 잃었었는지 누군가 흔들어서 깨웠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내 눈에 나를 깨운 남자의 목이 확대되듯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목을 물었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다가 생맥주 한잔을 단번에 마셨을 때 느껴지는 청량함이 느껴지면서 뱃속이 뜨끈해졌다.

 

손발에 힘이 붙었다.

 

나는 쓰러진 남자를 길 한쪽에 옮기고 내가 받았던 메모지를 남자의 가슴에 올려 놓았다.

 

<미안합니다.>

댓글 2

현이이이님의 댓글

작성자 현이이이 (219.♡.171.70)
작성일 09.20 23:38
필력이 🩸 ㄷㄷㄷ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104.♡.119.32)
작성일 09.21 08:39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지 마라. 흔하게 듣게 되는 말이었고, 직설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 혹은 굶주림에 그렇게 길가에 방치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매정하긴 하지만, 못본 척 지나치는 것이 그나마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는 선택이었다.
질끈 눈을 감고 지나가면 며칠 후에는 그 사람도 그 사람이 쓰러진 흔적도 치워졌다.
측은지심, 온정? 그런 건 지난 세대에나 남아 있던 잊혀진 유산 같은 거 였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 그 시절에는 먹는다는 게 음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타인의 혈액까지도 포함되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나는 그날 왜 그랬을까,
식료품을 사기 위해 마트로 가는 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에 어떤 젊은 사나이가 쓰러져 있었다.
경련이 일어나는지 손발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숨을 쉬기 어려운 게 아닐까, 아니면 심장이?
“...괜찮으세요?”

사나이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내게 와락 덤벼들더니 목을 깨물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악력이 어찌나 쌔던지 어깨가 부서지는 듯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정신이..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지 마라. 그 매정한 조언을 들었어야 했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허름한 천정이 보였다. 낡은 벽지와 쿰쿰한 냄새. 버석거리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겨우 눈을 돌려 내 주위를 살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왼쪽으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낡은 나무 복도, 아귀가 맞지 않아 삐익삐익 하는 소리가 발을 땔 때마다 들린다.
어떤 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은 가만히 계세요. 몇 시간은 좀 추스려야 할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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