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글쓰기] (11/20) 오늘의 한 단어 -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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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11.2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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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단어를 출제하고, 3줄로 된 글 쓰기를 해봅시다.
( 3줄이 넘어도 괜찮습니다. )
( 개그, 푸념, 에세이, 소설, 댓글, 일기, 언어유희.. 모두 괜찮습니다. )
저도 글 쓰기를 해볼께요.
( 본인 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보세요. 릴레이소설 아니어도 됩니다. )
*
본능이다.
길을 걷다 손에 잡기 적당한 막대기를 집어드는 것,
급하게 달음질을 쳐서 어떤 이를 사색이 되게 놀라게 하는 것,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고지를 함락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본능이다.
내 DNA 속에 새겨진 수컷의 본능.
*
* 앙님도 단어 하나를 출제해주세요. 저도 참여해보겠습니다.
// 글쓰기 모임
댓글 2
벗님님의 댓글의 댓글
@마성의물방개님에게 답글
이어지는 내용을 구상하고 정리한 후, chatGPT에게 글을 맡겨 봤습니다.
사람들은 자아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기억보존 인공두뇌 연구소를 찾는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자신의 두뇌가 균열을 보이고, 자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보조적 수단으로 기술의 힘을 빌려 자아를 원래 자리로 복구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기술에 의탁하여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그것이 정말 나일까?
내 자아가 내 두뇌를 벗어나
외부의 차가운 장치 안에 복제되고 재생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과연 나인가?
복구된 그것을 자아라 부를 수 있을까?
내 생각이 아닌
기계적 알고리즘으로 생성된 판단을 내 의식이라 인정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단호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 자아를 기계의 손에 맡기는 것은
결코 내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내가 그 기술을 거부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생명의 유한성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는 언제든 복제된 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육신이 소멸해도 자아는 기술적 이전으로 끊임없이 연장된다.
그들은 그것을 삶이라 부르고, 시대의 혁신으로 찬양한다.
반대로 나는 그런 삶을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시대의 조롱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나를 ‘원시인’이라 부른다.
현대 기술의 편의를 누리지 않고, 오히려 역행한다고 비웃는다.
어쩌면 그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둔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시대착오적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끝내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무언가가 잊혀지고 사라진다면, 그것은 내가 감내해야 할 시간의 흐름이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자아가 무너져도
그것이 자연의 섭리 아니겠는가?
복원되지 않을,
영원히 잃어버린 기억들조차도 나의 일부였음을,
잃었기에 더 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임을 나는 믿는다.
나는 오늘도 혼자 남겨진 듯한 감각을 느낀다.
주변의 기술 의존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나는 마치 투명한 유리벽 뒤에 갇힌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들이 아무리 내게 말해도,
그들의 언어는 내 마음에 닿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전하는 말도
그들에겐 무의미한 울림일 뿐이다.
단절된 소통 속에서, 나는 내 세계의 고독을 끌어안는다.
그것이 내 선택의 대가임을 안다.
기억을 보존할 수 없고, 다시 세울 수 없다면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인간답지 않은가.
잃고,
고통스럽게 떠나보내고,
그렇게 미련 속에서도 다음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
그런 것이 인간의 존엄 아니겠는가.
내게는 남은 시간 속에서 무너져가는 것들을 지켜보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그 용기로 스스로를 마지막까지 지탱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결국 사라질 것을 받아들인다.
시간은 흐르고,
내 생각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날이 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무너지더라도,
그 무너짐조차 나의 자아가 된다.
잃어버린 나의 일부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였음을 믿는다.
잘 쓰셨습니다. ^^
사람들은 자아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기억보존 인공두뇌 연구소를 찾는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자신의 두뇌가 균열을 보이고, 자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보조적 수단으로 기술의 힘을 빌려 자아를 원래 자리로 복구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기술에 의탁하여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그것이 정말 나일까?
내 자아가 내 두뇌를 벗어나
외부의 차가운 장치 안에 복제되고 재생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과연 나인가?
복구된 그것을 자아라 부를 수 있을까?
내 생각이 아닌
기계적 알고리즘으로 생성된 판단을 내 의식이라 인정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단호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 자아를 기계의 손에 맡기는 것은
결코 내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내가 그 기술을 거부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생명의 유한성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는 언제든 복제된 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육신이 소멸해도 자아는 기술적 이전으로 끊임없이 연장된다.
그들은 그것을 삶이라 부르고, 시대의 혁신으로 찬양한다.
반대로 나는 그런 삶을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시대의 조롱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나를 ‘원시인’이라 부른다.
현대 기술의 편의를 누리지 않고, 오히려 역행한다고 비웃는다.
어쩌면 그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우둔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시대착오적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끝내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무언가가 잊혀지고 사라진다면, 그것은 내가 감내해야 할 시간의 흐름이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자아가 무너져도
그것이 자연의 섭리 아니겠는가?
복원되지 않을,
영원히 잃어버린 기억들조차도 나의 일부였음을,
잃었기에 더 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임을 나는 믿는다.
나는 오늘도 혼자 남겨진 듯한 감각을 느낀다.
주변의 기술 의존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나는 마치 투명한 유리벽 뒤에 갇힌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들이 아무리 내게 말해도,
그들의 언어는 내 마음에 닿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전하는 말도
그들에겐 무의미한 울림일 뿐이다.
단절된 소통 속에서, 나는 내 세계의 고독을 끌어안는다.
그것이 내 선택의 대가임을 안다.
기억을 보존할 수 없고, 다시 세울 수 없다면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인간답지 않은가.
잃고,
고통스럽게 떠나보내고,
그렇게 미련 속에서도 다음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
그런 것이 인간의 존엄 아니겠는가.
내게는 남은 시간 속에서 무너져가는 것들을 지켜보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그 용기로 스스로를 마지막까지 지탱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결국 사라질 것을 받아들인다.
시간은 흐르고,
내 생각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날이 오더라도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무너지더라도,
그 무너짐조차 나의 자아가 된다.
잃어버린 나의 일부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였음을 믿는다.
잘 쓰셨습니다. ^^
마성의물방개님의 댓글
언젠가 자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으로 나를 돌아보며 오만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언젠가 함락되는 날이 오더라도 슬퍼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는 하나씩 잃어가는 시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