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글쓰기]오늘의 한 단어 -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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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디가니 123.♡.192.165
작성일 2024.11.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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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저항감 없이 눈이 떠진다. 방 안은 아직 어둑했고 통창엔 그려놓은 듯 가로등이 빛을 내고 있다. 분명 빛을 내고 있을 텐데 마치 그려놓은 빛처럼 눈부심이 없다. 귀찮아도 커튼을 치고 잘걸. 지금은 아마 새벽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일 것이다. 누운 채 손목을 들자 워치가 밝아진다. 4시 44분. 굳이 시각을 확인할 필욘 없었다, 오랜 습관이다. 어떤 행위을 시작하거나 끝낼 때 시각을 확인한다. 몸에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밤새 관절의 가동 범위가 다소 준 듯하다. 누워서 기지개를 길게 켜본다. 손가락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모든 관절의 인대를 길게 신장한다. 굵고 짧았던 고무줄이 가늘고 길게 늘어나는 이미지가 뇌리에 떠오른다. 바로 이어 고무줄이 끊어지는 망상이 이어진다. 이것도 습관이다, 지랄맞은.

몸을 일으키고 침대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간다. 아니 다시 폰을 찾아 침실로 돌아온다. 어둠 손에서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폰을 찾아 거실로 다시 나온다.

거실의 공기는 좀더 차고 건조하다. 정강이 피부가 당긴다. 평소 자주 샤워를 하는 편이라 보습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겨울에는 특히 그렇다. 바디로션 바르는 걸 조금만 게을리해도 정강이 쪽 피부는 쉽게 건조해지고 만다. 거실의 건조한 공기를 만나자 더 당기는 듯하다.

유튜브를 실행한다. 바로 실행되는 숏츠 화면에 잠시 정신을 뺏긴다. 서너 번 엄지손가락을 튕기다 순간 정신이 든다. 바로 구독 탭으로 들어가 요가 채널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늘 자 요가 프로그램을 찾아 실행한다. 광고 시청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30분 요가를 시작한다.

통창으로 통해 들어오는 건조한 가로등불이 거실을 뿌윰하게 밝히고 있다. 흐린 어둠 속 매트 위에는 얇은 잠옷을 입고 요가를 시작한다.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동작에서 시작한다. 몸의 관절이 부드러워지고 심장이 활기를 찾을 쯤 본격적으로 빈야사 아사나를 시작한다. 수리야 나마스카라가 기본이다. 사마스티티에서 다음 사마스티티까지 수리아 나마스카라의 구분 동작을 하나씩 추가한다. 수리야 나마스카라 A를 완성한 후에는 수리야 나마스카라 B로 넘어간다. 그러고 나면 차투랑가 단다아사나를 할 때 혹은 아도 무카 슈바나아사나를 할 때면 굵은 땀방울이 한두 개 뚝 하고 떨어진다. 다음에 가볍게 코어 운동 동작을 몇 개 추가해서 수행한다. 눈을 돌려 벽시계를 쳐다본다. 시계는 5시 46분,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마지막 사바아사나에 들어가고 몸은 깊게 이완된다. 호흡을 시작한다. 마음 속으로 열을 셀 때까지 들숨을, 다시 열을 세면서 날숨을 한다. 그렇게 천천히 호흡을 하다가 내 흡기와 호기가 내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다 차츰 내 몸 전체로 흐른다. 옴 ... 그리고 불현듯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 이런 새벽녘에도 그랬었지 ... 옥상에 올라 점점이 별이 박힌 검은 하늘 아래서 결가부좌를 틀고 있었었지 ... 그 기억을 좇다보니 몸은 사바아사나를 취하고 있으나 마음은 어느새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몽롱한 기억들 .... 옴 ... 소리조차 흐려지더니 의식이 밝아진다. 잠깐 잠들었던 모양이다. 시계는?

아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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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일기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네요.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떠올린 게 하나 더 있는데 전날 읽은 글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음악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인데, 가능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음악의 기능은 생각과 대화를 막는 것이며, 만약 음악이 없다면 끼어들게 될 새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라디오를 이용하고 있다.


조지 오웰 '행락지(Pleasure Spots, 1946)'의 한 구절입니다. 물론 심신의 위안이 되는 예술로서의 '음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현대적 행락지(리조트)에서 음악이 하게 될 기능을 지적한 것이죠. 제 호흡 소리에 집중을 하다가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음 같은 침묵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듯 말 듯해졌습니다.

댓글 3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112.♡.121.35)
작성일 14:59
정적 안에서 제 자신을 느낄 때는 규격에 맞지 않는 듯한 불편함을 느끼지만,
정적 안에서 제 자신을 느낄 수 없을 때에는
마치 제3자의 시각, 제3자의 자아인냥 그 고요 속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오감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전달해야 하는데, 전달받을 주체를 잃어버린 것처럼,
손 놓고 그 안에서 스톱되어 버리는 거죠. 이것이 안락함인지, 일시정지인지 인식도 하지 못하고..

멋진 글 잘 보고 갑니다. ^^

팬암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팬암 (203.♡.217.241)
작성일 15:09
"뿌윰하게" 단어는 처음 보는 단어라서 '어디가니' 님이 참 재미있게도 표현하셨다 생각했는데 원래 있는 표현이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어디가니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어디가니 (210.♡.254.193)
작성일 15:28
@팬암님에게 답글 저도 최근 박경리 "토지"를 읽으면서 본 단어입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독서 이력이지만 박경리 외 타 작가 작품에서 "뿌윰하다"란 형용사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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