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두 번째, '10가지 이야기' - 6.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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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자,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관계가 더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얘기를 학창 시절에 들었었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숙맥, 아.. 그런 건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듯했다. 아무래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더 적극적이니까.
그러니, 여자가 남자한테 매달리는 것보다 남자가 여자에게 매달리겠지.
이게 더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까? 그럴듯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좋다는 여자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콧대 높았던 그녀.
너는 아니다라고 몇 번을 거절했는지 모른다. 그래, 친구도 좋다.
친구로 그냥 친구로. 참 끈질기게 그녀 곁을 지켰다.
결국 승낙을 얻어내고, 그녀의 정식 남자 친구로 소개되기까지 참 오랜 시일이 걸렸다.
결과를 놓고 보면, 내가 사랑을 쟁취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잘 맞지도 않던 일기예보가 왜 그날따라 딱 맞는 건인지,
창밖 하늘은 조금 흐리긴 했어도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겨우 몇 시간, 번거롭게 우산을 들고 간다니, 스타일을 해친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 꺼낸 개그들은 실패의 연속.
심드렁한 표정의 그녀,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도 많은데.. 시간은 잘도 간다.
다음 약속은 잡아보지도 못하고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후드득 떨어지는 소나기.
하.. 하늘도 나를 퇴짜 놓는 것인가.
등 뒤에서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3단 우산을 하나 툭 건네고는 나간다.
여분의 우산이 하나 더 있었다나.
난 그 시니컬한 그녀에게 반했다.
시니컬한 그녀.
몇 개월이 지나고,
소개해 줬던 친구에게 묻고 물어서 그녀와의 다음 인연을 이었다.
우산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는,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구차한 명분으로.
비가 내린다.
여전히 일기예보는 잘 맞지 않는다.
비싼 슈퍼컴퓨터를 쓴다면서.
그녀, 아니 내 와이프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항상 우산을 챙기지 않는다며.
자신이 예전 그 가게에서 우산을 얼마나 어렵게 빌렸는지 아냐며.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흠, 그런 거 그냥 근거 없는 소리다.
이제는 누가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 25년 두 번째, '10가지 이야기'를 써봅시다.
https://damoang.net/writing/353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