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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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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프로그피쉬 112.♡.76.76
작성일 2024.07.02 23:01
분류 글쓰기
39 조회
1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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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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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싫다. 생각하기 싫어. 그냥 글이나 써야지.'




찬우와의 관계가 복잡해진 수정은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우선 컴퓨터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켜서 새 파일을 만들었다.




[무제.scriv]




수정은 생각이 복잡할 땐 즉흥적인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아무거나 막 써대다보면 무슨 글이든 쓰여졌고 그 글이 꼭 어딘가에 내놓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음이 편했더랬다.




막상 뭘 써야할지 몰라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단어를 나열해가며 뭐라도 글을 써대면 문장이 마구 만들어져갔다.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쓰는 이런 글쓰기는 목적도, 논리도 하물며 개연성 조차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글을쓰는데 논리, 개연성, 핍진성⋯ 그런것들이 중요하다지만 글을 쓰는데는 그런게 방해가된다. 처음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그런데 한 개인에게 닥치는 현실은 그 자신의 시선에선 별다른 개연성도, 목적도 없어보이는데도 그냥 들이닥치곤 하잖는가? 여지껏 살아온 삶에도 개연성없는 일이 일어나는 건 어차피 마찮가지였다.




그와의 재회가 그랬다. 어느날 갑자기 찬우가 자신 앞에 다시 나타나 마주친 우연 조차 그녀에겐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두 개의 단어 써보았다.




[찬우, 낚시]




이때부터는 머리가 쓰는게 아닌 것 같았다. 의자에 붙은 엉덩이가, 키보드에 붙은 손가락이 활자조합을 막 만들어댔다.



[햇살이 따스한 오후, 직장상사에게 치여살던 찬우가 한적한 바다를 찾아 구석진 자리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가락의 질주가 키보드 위에서 시작된다.


"타다다닥 탁탁탁."


수정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의 인생도 흘러간다.



[민물이 드러서는 수문 앞 기수지역에는 작은 숭어새끼들이 떼지어 노닐고 있었지만 낚시바늘에 걸리진 않았다.

입질이 없는 건지 아니면 찬우가 찌를 보고있질 않은 건지 챔질 없는 적막이 흐를 뿐이다.


“아, 회사 때려치고 싶네.”

혼자 중얼거리는 찬우.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의 그림자가 기울어져갔다.

그러다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야! 너땜에 그늘지잖아. 저리 안비켜?”


발 밑의 뻘밭에는 갯지렁이 한마리가 머리를 내밀고선 찬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찬우는 물고기 밥 주제에 말을 걸어오는 갯지렁이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에게 햇빛이 닿도록 살짝 비껴 앉고선 호기심이 생긴 찬우가 말을 걸어보았다.


“넌 누구니?”


“내 이름은 링고야.”


“거기서 뭐해?”


“일광욕을 하고 있지.”


링고는 툴툴거리는 투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여기가 채광도 좋고 물흐름도 적당하고 큰 물고기들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서 쾌적하고 안전한 최적의 장소라고. 흥!”


그말을 들은 찬우에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바다갯지렁이는 양식이 까다롭다. 이녀석을 데려가 집을 지어주면 갯지렁이가 살기좋은 환경을 알아 맞추기 좋을 것 같았다.


“링고야, 나랑 친구하지 않을래? 내가 정말 편하고 안전한 집을 만들어 줄께.”


그렇게 링고와 친구가된 찬우는 그를 데리고가서 갯지렁이들이 잘 살고 많이 번식할 수 있는 뻘밭 수조를 만들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갯지렁이 미끼 유통사업을 시작 할 수 있⋯⋯.]


자신이 써내려가는 이야기에 몰입되어 갔다.


수정은 어느새 쌓인 글조각들을 바라보며 역시 글은 머리가 쓰는 게 아니라 책상 앞에 앉은 엉덩이가 쓰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만해도 무엇을 쓸지 생각조차 못했지만 무엇이라도 써지게되는게 즉흥적인 글쓰기는 마법같은 매력이었다. 



수정은 쌓여가는 글조각들을 한데 모아봤다. 당장은 별의미도 없어보이는 활자조합을 고쳐가며 하나로 이어봤다.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음? 이러면 짧은 동화책 한 권 쯤은 될 것 같은데?'



어린이 문학 문체로 바꾸는 작업을 한 뒤 이번엔 시놉시스와 캐릭터 설정을 작성 해 보았다.



[ 시놉시스: 오늘도 어김없이 직장에서 혼이 난 찬우, 무얼해야 더 나은 삶을 이룰지 매일같이 고민한다. 낚시를 하던 어느날 얹짢은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갯지렁이 '링고'를 만나는데⋯⋯.


이야기의 모럴: 혼자서는 초라하고 별 볼 일 없지만 친구와 함께라면 서로의 장점을 살려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 ]


'됐다. 동화는 처음인데 편집자님한테 연락해 봐야 겠는 걸.’



이번엔 동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변경하기위해 글쓰기 프로그램의 ‘찾아 바꾸기’ 기능을 실행시켰다.



찾기: 찬우


대체: 시드니


수정은 잠시 멈칫하고선 찬우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옅은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곧 ‘모두 바꾸기’ 버튼을 클릭 해버렸다.


이제 완성한 초고를 컴파일해서 읽어본다. 수정의 동화 속에 잠시 등장했던 찬우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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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작가인 소설 속 캐릭터의 이야기를 통해 제가 글쓰는 방식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1

벗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벗님 (140.♡.29.3)
작성일 07.03 00:20
이름이 바뀌고, 겉옷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고.. 문득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익숙하지 않은 익숙함, 이질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난감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말했다. ‘나야.. 잘 지내?‘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문득, 내가 알고 있던 이들이,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 또한 내가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인식’만이 남았을 뿐..

잘 쓰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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