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왕의 무덤이 도굴피해가 없었던 이유

알림
|
X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홀맨 175.♡.155.138
작성일 2024.07.17 11:34
1,752 조회
5 추천
글쓰기

본문

태조  이성계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 왕의 무덤 왕묘 중에서 

도굴 피해가 있을것으로   추정되고  기록되어 있는 무덤이 딱 2-3개 정도 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도굴해도 훔쳐갈만한 것이 없습니다.   돈이 안된다는 거죠.

금 보석  이런거 하나도 없습니다 ㄷㄷㄷ 

조선왕조 무덤들중에서 도굴 피해가 있었던것이 임진왜란 때였는데

이때도 2-3개 정도 왜놈들이 파보고 아무것도 없어서 그이후로는 다른왕의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번째 이유로는 조선왕릉 무덤을 만들때  땅을 깊게파고   목관위로는 석회가루를 뿌려서

단단하게 만드는데  석회랑 모래 자갈 이런것들을 합치면 콘크리트 수준의 강도가 나온다고 합니다.

도굴하는 입장에서는 진짜  땅을 못파는거죠.  콘크리트 수준의 땅을 파헤치고 다 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후로도 도굴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때도  일본놈들도 이걸 알아서

조선 왕릉은 도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게시물이 없습니다.
댓글 8 / 1 페이지

meteoros님의 댓글

작성자 meteoros (118.♡.14.177)
작성일 07.17 11:35
유교의 맥락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blast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blast (112.♡.34.62)
작성일 07.17 11:36
@meteoros님에게 답글 회곽묘 배율도 있죠.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빈번했다지만...

blast님의 댓글

작성자 blast (112.♡.34.62)
작성일 07.17 11:35
도굴꾼 오페르트도 한 수 접었다는 석회...

BECK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BECK (210.♡.183.1)
작성일 07.17 11:37

아앗! 죄송

우스캉님의 댓글

작성자 우스캉 (222.♡.36.176)
작성일 07.17 11:37
제일 유명한 오페르트 도굴 사건도 저 석회를 밤부터 뚫다가 아침에 밭일하러 가던 농민들 ㅡㅡ; 에게 발각되서 주민 신고로 실패했다죠.

Picards님의 댓글

작성자 Picards (218.♡.6.125)
작성일 07.17 11:42
생석회 회반죽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가 더 커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처음 굳기 시작할 때 발열이 심해 습도를 다 날려버려 시신이 미이라화 되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그럼 정말 신기할텐데 말이죠. 세종대왕릉 파묘해서 미이라화 된 세종대왕님 사인도 좀 밝혀보고 하면...

humanitas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umanitas (78.♡.45.236)
작성일 07.17 16:09
@Picards님에게 답글 가끔 조선시대 묘에서 이장하려고 파 보니...
미이라화된 상태로 있었다... 이런 기사들이 있었죠.
그런 기사들에서 미이라화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Picards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깜순할매님의 댓글

작성자 깜순할매 (118.♡.65.185)
작성일 07.17 12:41
임란때 털린게 중종릉입니다.
시체도 못찾아서 나중에 대충 비슷한분, 이분이 중종할배 같아! 라며 시신 수습해서 다시 안장했다고 하지요.
글쓰기
전체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