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이 세계사에 미친 큰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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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코미 118.♡.65.124
작성일 2024.10.0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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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명분을 제공했고, 그 결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의 붕괴와 일본의 제국주의 열강 진출까지 연쇄작용을 일으켰거든요.


일본 근현대사의 대사건 메이지 유신의 원인 중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전래된 성리학입니다.

그게 뭔 소리냐 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살펴보죠.

그 시대 일본은 무규칙 베틀로얄의 전국시대라 하극상과 배신, 통수가 기본이던 곳입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그래서 배신당하고 망해버린 거죠.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으로 들어온 조선 성리학을 주목했죠.

흔히 일본 매체에서 나오는 주군에서 충성하고 본분을 다한다는 무사도는 바로 저 성리학의 선비 정신을 일본에 맞게 로컬라이징 한 겁니다.

처음에는 그 성리학은 막부의 의도대로 쇼군과 다이묘에게 충성한다는 사회 질서 확립과 안정에 기여하고 평화를 가져다주긴 했습니다.


문제는 일본인들도 성리학 공부를 더 하다보니 모순을 느낀 겁니다.

일본 정치체제가 덴노가 국가의 지배자지만 실질적으로는 허수아비고 그 아래 쇼군이 왕 행세를 하며 다스리는 게 성리학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저건 딱 왕망이나 동탁같은 권신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전횡을 하는 걸로 보이는 거죠.

성리학을 공부했다면 저런 상황은 비정상이고, 당연히 타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점차 존황양이, 즉 덴노를 진정한 일본의 통치자로 되돌리고 쇼군을 몰아내자는 소리가 나왔고 페리 제독의 협박으로 억지로 개국한 이후 쇼군의 권력과 힘이 약해지자 공공연히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는데 성리학에서 따온 존황양이 사상이 큰 명분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정부를 만든 일본은 조선을 미개한 오랑캐니 교화시켜야 한다는 유교적 논리를 이용해 결국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가지로 조선 도자기와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도와줬기에 아이러니한 일이죠. 

댓글 8 / 1 페이지

츄하이하이볼님의 댓글

작성자 츄하이하이볼 (172.♡.95.47)
작성일 15:19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779/read/40372630?view_best=1&type=gallery

무사도 - 선비정신으로 치환한 건 근본이 있었던 거군요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코미 (160.♡.37.47)
작성일 15:20
@츄하이하이볼님에게 답글 성리학이 오기 전에는 사무라이들은 주군에게 충성하기보다 이해득실을 따져서 배신하거나 이직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heltant79님의 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15:21
존왕양이라는 말부터가 중국의 춘추오패가 내세운 개념이죠.
그런데 그 춘추오패도 주나라 왕실 복원에는 관심이 없었고 철저히 지네 권력 강화를 위해 내세운 프로파간다가 존왕양인데, 그걸 일본에서 또 지네들 입맛에 맞게 소화한 걸 보면 재미있습니다.

삼불거사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삼불거사 (210.♡.187.179)
작성일 15:22
이황의 퇴계학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크죠. 일본은 성리학 안한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대표적인 헛소리입니다.

트라팔가야님의 댓글

작성자 트라팔가야 (58.♡.217.6)
작성일 15:25
조선 성리학이 메이지 유신을 촉발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기여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실제 원인은 성리학보다 서구 열강의 압박과 근대화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성리학은 오히려 막부의 보수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사상이었습니다.

heltant79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heltant79 (61.♡.152.147)
작성일 15:35
@트라팔가야님에게 답글 성리학이 막부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말도 맞고,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도 맞는 것 같습니다.

에도 막부는 미토 학파의 성리학자들을 후원하며 체제 안정을 꾀했는데, 오히려 막부 후기에는 흔히 "도막파"로 불리는 사무라이들에게 이 미토 학파가 사상적 영향을 많이 주었습니다.
특히 막부 중신이던 이이 나오스케가 덴노의 형식상 추인도 없이 서양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자, 덴노가 미토 번에 비밀 칙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막부가 안세이 대옥으로 존왕양이파를 숙청하는 반동으로,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이 금문의 변까지 이어지죠.

이 존왕"양이"가 존왕"개국"으로 이어지는 건 메이지 유신 후반기의 일이고, 시작할 때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존왕양이 사상이 큰 역할을 하긴 했습니다.

코미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코미 (160.♡.37.47)
작성일 15:36
@트라팔가야님에게 답글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지사-신정부군이 내세운 존황양이부터가 미토학 등 당시 일본의 성리학을 충실히 따른 겁니다.

두냥아빠님의 댓글

작성자 두냥아빠 (49.♡.138.231)
작성일 15:49
관련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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