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렬의 사고방식이면 학살도 감행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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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의 국지전, 전면전도 불사했다면.
과거 제주4.3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비슷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특히 4.3사건 주범인 서북청년단 단복을 만들어 입고다니는 것을보면.
경악을 금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문경 양민학살사건은 제 고향에서 있었던 일인데
노무현 대통령 참여 정부들어서 진실화회위원회 조사 발표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학살이 일어난 뒤 이를 보고받은 경찰은 시신을 가매장하였으며, 이승만 정부는신성모국방부장관을 문경에 내보내어 은폐하도록 하였다. 신성모 장관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제2보병사단장과 25연대장유해준중령을 모두 해임하였지만 이는 내부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학살과 관련된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언론을 통제하였고 군이 저질렀던 학살을 빨치산의 양만학살로 조작하였다.
이 사건은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유가족들의 요청에 따라서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함으로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한 학살이었다는 진상이 규명되었다. 이후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하였으나 1심과 2심에서는 손해배상 시효가 소멸되었다며 국가의 책임은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다행히 대법원은 진실을 은폐하고 진상규명을 하지 않은 국가가 시효완성을 이유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을 내렸다.[3]
문경양민학살 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문경 석달마을(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은 배너미산(813m)과 단산(956m), 조항령(673m)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골마을이다.
사건 발생 당시 마을에는 24가구 127명이 살았다.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그날도 여느 산골 마을의 겨울처럼 낮부터 추위가 매서웠다. 그날 정오경에 무장 군인 70여 명이 마을에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초가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주민들을 모두 마을 앞 논에 모아 놓고 특별한 이유 없이 소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확인사살한 후 마을 뒤 산모퉁이로 이동하면서 마을로 돌아오던 청·장년과 학생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마을 주민 127명 중 8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부상자들 가운데 4명은 방치돼서 그리고 1명은 병원에서 치료 중에 숨을 거뒀다. 그날은 아무 특별할 것 없는 겨울의 하루 낮이었다. 벼락처럼 내리친 이 사건으로 희생된 마을 주민은 모두 86명이었다.
마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전체 주민 127명 중에서 86명이 희생되고 마을의 전체 가옥 24채와 가을걷이한 곡식을 저장해 놓은 창고까지 모두 불에 탔다. 마을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첫 돌이 지나지 않은 유아 5명을 포함해서 12세 미만 어린이가 26명이었고,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절반인 42명이었다. 그중 국민학생이 6명이나 됐고, 타지역 동민도 1명 있었다. 전 가족이 몰살된 집이 5세대, 여자 1명만 생존했거나 남자 1명이 생존했어도 고령이어서 대가 끊긴 경우도 6세대나 되었다.
96230991님의 댓글
할말이 없습니다
용산으로 이전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을지도요
2024년4월10일님의 댓글
1. 척결 = 살을 긁어내고 뼈를 발라냄
2. 처단 = 죄를 물어 처치한다
3. 쓸어버려 = 어이가 없.. 용산은 조폭입니다
부산혁신당님의 댓글
폭주한닷님의 댓글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고요.
열공에서 보도했듯이 살인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할 사이코패스들입니다.
HENE님의 댓글
상아78님의 댓글
96230991님의 댓글의 댓글
미국은 포함되지않는것같습니다
콰이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