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남태령 대첩' 후기

알림
|
X

페이지 정보

작성자 브래드베리 106.♡.138.153
작성일 2024.12.23 13:46
2,612 조회
167 추천
쓰기

본문

크리스마스를 앞 둔 월요일 다들 점심은 자셨는지요?


토요일 저녁부터 유튜브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결국 어제 일요일 점심 먹고서나 갈 수 있었습니다. 차를 몰고 남쪽에서 남태령 방향으로 향하니 고개 입구에서 경찰이 막아 섰습니다. 선바위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남태령을 올랐습니다. 생각보다 큰 고개더군요. 이것 저것 껴 입고 나와서 땀이 다 났습니다. 중간쯤  남태령 옛길 표지석도 보이고(여기에 '여우고개'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살면서 언제 또 남태령을 걸어서 넘어가 보겠나 하는 생각으로 끙끙대며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거의 도착할 무렵, 택시에서 한 아주머니가 내려서는 짐을 들고 고개를 오르십니다. 터질 듯한 숄더백 하나, 손에 들고 있는 스티로폴 박스 하나...무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먼저 말을 걸기도 그래서 그냥 지나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먼저 '어디 가세요?' 저에게 묻습니다. 집회 간다고 말하기는 좀 저어해서 '어디 가시는데요?' 되물으니 아주머니는 '저기 집회 가요' 하십니다. 제가 대꾸도 없이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니 아주머니도 눈치를 채신 듯 별 말 없이 바닥에 박스를 내려 놓으십니다. 아주머니는 숄더백 메고, 저는 박스를 들고 같이 고개를 넘어 가는데 아주머니가 먼저 입을 여십니다. "80년에 광주에 있었다. 오빠가 말리는 바람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날에는 차 위에 있던 시민군이 머리에 계엄군의 총을 맞고 쓰러지던 모습도 보았고 태극기 덮힌 관도 직접 수도 없이 보았다. 계엄군이 쏘는 소리는 '드르륵' 하는데(기관총 소리) 시민군이 쏘는 소리는 '탕, 탕' 하더라. 그 후 결혼을 했는데 남편과 생각이 잘 맞지 않아서 내색 못하고 살았고, 오늘은 다행이 남편이 골프를 치러 가서 늦게 온다고 하니 이렇게 가는 길이다"...그 마음, 그 상처를 다 헤아릴 수 없어서 어떻게 대꾸를 하고 반응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40년 전에 그렇게 고생하셨으면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쉬지 그러셨느냐" 했더니...별 대꾸는 안 하시네요.  


고개를 넘어 조금 내려가니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주머니와 가지고 온 음식들 나눠 드리니 다들 고맙다 하십니다.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고 저는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역시 여의도와 마찬가지도 제 주변으로는 다 젊은 여성들입니다(최고!!). 그런데 한 1시간쯤 앉아 있다가 보니 다시 그 아주머니가 보였습니다. 가방에 뭘 들고 오셔서 또 나눠 주시는 것 같더라구요, 이 번에는 그렇게 무거운 짐은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마도 주먹밥 만들어 시민군에게 나눠 주시던 어머니들 모습이 아주머니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나 봅니다.  


한 3시간 정도 지났나요. 길이 열리고 행진을 한다는 말에 다들 환호....트랙터 10대가 선두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시민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시민들이 빠져 나갈 때 양 옆으로 남은 농민분들이 서 계셨는데, 서로에게 박수치고 환호하고 화이팅하고 고생했다 말해주고 정말 울컥했습니다. 농민 분들은 모두 검붉게 그을린 주름 깊이 패인 얼굴,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손녀뻘 되는 젊은 여성들은 힘 내세요, 화이팅 하면서 지나가는데...너무 너무 울컥했습니다. 좀 지나니 다시 행진하는 시민들을 항해 홀로 홍범도 장군님 같은 포스로 "농민도 국민이다...." 급조한 손 팻말을 들고 우뚝 서 계시던 농민 분의 눈빛은 정말 잊혀지지 않습니다. 거짓말 안 하고 정말 호랑이 한 마리가 서 있는 것 같았어요. 


사당역까지 행진을 끝으로 저는 집으로 복귀했습니다. 현실에 절망하고 뉴스에 분노한 마음을 치유 받고자 자꾸 집회에 나가는 것 같습니다. 빨리 일상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농민분들도 추운 겨울 아스팔트가 아니라 마을회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군고구마 드시면서 도란도란 살아가는 이야기나 하실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평생 농사 지으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많이 생각 나네요.


댓글 23 / 1 페이지

에러맛스타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에러맛스타 (116.♡.230.113)
작성일 13:49
정말 계엄의 트라우마를 겪으신 분의 증언이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자리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Java님의 댓글

작성자 Java (116.♡.70.94)
작성일 13:50
수고많으셨습니다~

dreamwith님의 댓글

작성자 dreamwith (123.♡.197.2)
작성일 13:52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아주머니 짐 들어주고 이야기들어드린거 정말 제자리가  모니터 너머지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꼬질이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꼬질이 (58.♡.177.142)
작성일 13:55
고생많으셨습니다.

통만두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통만두 (202.♡.209.220)
작성일 13:55
상세하게 적어주셔서 상황이 눈에 보이는 것 같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GerrarDinho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GerrarDinho (218.♡.32.11)
작성일 13:57
고생하셨고... 감사드립니다ㅠㅠ

독행남아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독행남아 (115.♡.31.36)
작성일 13:59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potatochips님의 댓글

작성자 potatochips (118.♡.165.189)
작성일 13:59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ㅠㅠ

파란님의 댓글

작성자 파란 (203.♡.98.170)
작성일 14:00
고생 많으셨어요. 글도 감사합니다.

꽃부자님의 댓글

작성자 꽃부자 (14.♡.41.157)
작성일 14:01
오늘 저 눈가에 땀이 하시는 분들 왜 이리 많으신겁니까 ㅠㅜ

나옹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나옹 (124.♡.236.163)
작성일 14:07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인가 싶네요.

알로에비어님의 댓글

작성자 알로에비어 (112.♡.217.143)
작성일 14:09
뉴스에 분노한 마음을 집회에 가서 치유받는 다는 말이 무척 공감되네요. 고생많으셨고  깊은 감사드립니다.
우린 우리끼리 살게 냅두고 윤수괴랑 쟤들은 지들끼리 살게 모아주면 좋겠어요. 서로의 지옥이 되어주게..

weepsgently님의 댓글

작성자 weepsgently (211.♡.54.7)
작성일 14:15
가슴 뜨거운 현장소식 감사합니다.😊

래비티님의 댓글

작성자 래비티 (218.♡.64.244)
작성일 14:21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BearCAT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BearCAT (118.♡.93.36)
작성일 14:23

istD어토님의 댓글

작성자 istD어토 (121.♡.23.219)
작성일 14:25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

팡션님의 댓글

작성자 팡션 (117.♡.25.118)
작성일 14:38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ㅠㅠ

대한독립만세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대한독립만세 (211.♡.42.109)
작성일 15:00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승업님의 댓글

작성자 장승업 (175.♡.74.4)
작성일 15:48
고맙습니다.

햄토리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햄토리 (211.♡.196.248)
작성일 16:10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었을텐데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Fatherland님의 댓글

작성자 Fatherland (180.♡.120.94)
작성일 17:23
너무 너무 감사드려요 고생많으셨습니다

diynbetterlife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8:17
광주 학살의 현장을 직접 겪으신 아주머니
바로 지난 주말 남태령에서 "농민도 국민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ㅠㅠ

호호바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호호바 (211.♡.20.19)
작성일 20:08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쓰기
홈으로 전체메뉴 마이메뉴 새글/새댓글
전체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