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꽁돈의 정체(feat. 시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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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그레이스리 121.♡.54.74
작성일 2025.01.26 12:11
887 조회
30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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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86세가 되신 시아버지께서는 몇 해 전 경도인지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 MCI)를 진단받으시고 약을 복용 중이세요. 기억력 저하를 늦추고 일상생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도, 다른 가족들도 함께 노력하고 있지만, 증상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깊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독감에 걸리셔서 밤새 고열로 힘들어하시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집 근처 내과를 홀로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사 앞에서 왜 병원을 오게 되었는지조차 잊어버리시고 증상을 말씀 못하셨다고 해요. 다행히 자주 뵙던 의사 선생님께서 상황을 파악하시고, 시어머니께 따로 이유를 여쭈어 해결하셨구요.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가족으로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날로 더해갑니다. 그러고 보면, 제 아이들에게 학원 다녀왔냐고 네 번, 다섯 번 반복해서 물으시는 일은 어쩌면 너무 사소한 일처럼 보이네요. 그래도 아이들은 늘 처음 듣는 듯 “네, 할아버지, 잘 다녀왔어요!”라고 매번 밝게 대답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갑니다. 글을 적다 보니 아이들에게 아픈 할아버지가 인내심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라 여겨져서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이번주 초 아침, 시어머니께서 손주들에게 나눠줄 설 세뱃돈을 준비하시느라 서둘러 은행에 다녀오셨습니다. 빳빳하고 윤기 흐르는 새 돈을 정성껏 흰색 봉투에 담아 시아버지께 건네 드렸구요. 아버님께서 스스로 집안의 어른으로서의 자부심을 잊지 않으시길 바라는 시어머니의 배려였겠지요. 아버님은 돈봉투를 잘 보이는 곳에 두셨고, 손주들에게 세뱃돈 나눠줄 시간을 기다리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시아버지께서 시어머니께 해맑은 얼굴로 다가오시면서 “꽁돈이 이렇게 많이 생겼어!”라며 손에 든 돈을 보여주시면서 자랑하셨다고 합니다. 기억의 혼란 속에서 아버님께서는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왜 이렇게 새 돈이 많은지 궁금해하셨고, 시어머님께서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조근조근 설명해드렸구요. 전화로 시어머니께서 이런 일도 다 있었다라며 알려주셔서 이야기 전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종종 두 분만 계실 때 시아버지께서 고집을 부리시거나 별 것 아닌 일에 화를 내신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러나 제가 결혼한 지 20년 동안 마주해온 아버님은 늘 조용하고 온화한 분이셨습니다. 남편이 장남이라 근거리에 살고 있는데, 방문할 때마다 “왔냐?”라는 짧은 외마디 인사말에 따뜻한 반가움이 담겨 있음을 저는 알지요. 하지만 최근들어 아버님의 기력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당신 스스로도 흩어져 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아픕니다. 나이듦이 슬프게 다가옵니다.

저희 집은 설날을 맞이하여 내일 모레 오후부터 온 가족이 모일 예정입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다음날 아침에 세배를 올리구요. 아버님께서는 한 명 한 명 손녀딸들의 이름을 헷갈리지 않게 힘주어 부르시면서 세뱃돈을 나누어 주시겠죠. 아이들에게 ‘꽁돈’ 이어서 ‘뜻밖의 선물’같았던, 사연있는 새뱃돈(어쩌면 아버님은 모든 것을 잊었을지도...)을 건네며, 짧지만 깊은 덕담도 하실거구요. 아버님께서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그리고 오래도록 모두의 곁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p.s., 설 명절을 맞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또한 멀리 이동하시는 분들 안전한 귀성길 되세요. 우리나라도 혼란에서 벗어나 새해에는 하루 빨리 안정을 찾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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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1 페이지

문없는문님의 댓글

작성자 문없는문 (1.♡.116.18)
작성일 어제 12:24
뭔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따뜻하네요.
평온한 설 명절과 새해를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 앞으로 뭔가 줄줄이 시리즈가 나올 것 같은 제목 넘버링이네요~ ㅎㅎ

그레이스리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그레이스리 (121.♡.54.74)
작성일 어제 14:01
@문없는문님에게 답글 감사합니다. 번호를 붙여놓으면 나름의 정리효과도 있어서요^^  줄줄이 글쓰기 노력해보겠습니다.

happytree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happytree (39.♡.16.2)
작성일 어제 13:20
따뜻한 글 참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리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그레이스리 (121.♡.54.74)
작성일 어제 14:01
@happytree님에게 답글 감사합니다, 해피트리님. 새해 건강하세요!

레오야사랑해님의 댓글

작성자 레오야사랑해 (211.♡.113.108)
작성일 어제 13:24
글에서 가족의 화목함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리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그레이스리 (121.♡.54.74)
작성일 어제 14:02
@레오야사랑해님에게 답글 감사합니다. 새해 레오와 더욱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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