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두 개의 칼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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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그렇지만, 신학도 이원론적으로 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가져온 인물이 전에 제가 말씀드린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 근원으로 가면 뭐 그리스 철학도 나올테고, 마니교도 나오겠지만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암튼, 전에 말했듯 아우구스티누스는 천국과 세속국가는 가는 경로와 운동방식은 다르다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세 정치 사상 흐름이 나옵니다. 교황 겔라시우스 1세는 '두 개의 칼' 이론을 내세우는데요. 당시 교황은 동로마제국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주교와 갈등 중이었습니다. 여기서 갈등 원인은 단성론인데 저도 대충 아는 거라 넘어가겠습니다. 뭐 본질은 교황과 동로마제국 황제와의 힘싸움이라고 보는 게 맞긴 합니다. 여기서 겔라시우스 1세는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두 개의 칼이 준비되어 있다고 답한 것에 기인하여, 하나님의 칼 하나는 교권이요, 또 다른 칼 하나는 세속권력이라고 말하죠. 하나님은 이 2개의 칼을 이용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겔라시우스 1세는 자신도 동로마 황제와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베드로가 이 2개의 칼을 가지는 것을 볼 때, 결국 전체적인 권력은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죠. 결국 후대 교황은 신흥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와 결탁하여 동로마 황제와의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고, 이 '두 개의 칼' 이론은 중세 주요 정치 사상이 됩니다.
하지만, 샤를마뉴가 죽고 여러 이합집산 후에 신성로마제국이 등장하면서 제국황제와 교황은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대립하기도 했지요. 당시 다른 동네도 그랬지만, 신성로마제국 내에도 주교가 세속영주처럼 다스리는 영토가 있었고, 이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 곧 서임권이 황제와 교황 간의 분쟁 원인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교 임명권을 갖고 싶었고, 교황은 이를 놓치기 싫었죠. 여기서 그 유명한 하인리히 4 VS 그레고리오 7세의 서임권 투쟁, 이른바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발생하지요.
여기서 '두 개의 칼' 이론에 대해 양측의 해석 방향이 달랐습니다. 교황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두 칼 모두를 챙겼으니 둘 다 근본적으로는 교황 거고 주교 서임권은 자신의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황제 측은 두 개의 칼은 서로 본질적으로 다른 건데 왜 세속권력에 간섭하느냐고 따졌던 거죠.
그러나 이런 교권/세속권력의 갈등은 이론에 따라 이뤄진 것은 아니긴 했습니다. 교황과 황제 또는 왕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이뤄진 것이었죠. 정치적으로 말빨과 힘이 교황이 세면 파문 같은 경고가 먹히는 거고, 반대로 국내 통합이 잘된 프랑스 왕 같은 경우에는 왕이 더 힘이 세서 교황을 잡아서 아비뇽 같은데 쳐박아 둘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두 칼 이론'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교권/세속권력의 구분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정치라는 거나 권력이라는 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이론에는 그런 게 없었지요.
그래서 이후 이 이원론적 구조에 피지배자가 끼어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피지배자의 존재가 대두되면서, 정치 사상은 삼원론적 구성을 갖추게 되는 데... 이게 그 유명한 프랑스의 삼부회입니다. 이 삼부회의 개념은 언제 등장하느냐... 프랑스 학자인 조르쥬 뒤비에 따르면 프랑스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제국 오토 3세와의 전쟁인 부빈 전투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족-사제-평민들의 행진이 이어졌고, 이게 삼부회의 시초가 되었다는 거죠. 프랑스 혁명에서 이 삼부회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쥬. 그건 다음에 할 얘기입니다. ㅋㅋ
RubyBlood님의 댓글